생태주의와 탈식민주의 협주곡 제1번 페미조

(Ecologism and Postcolonialism Concerto No.1 in Feminism)

최존

 

  

  내가 채식주의를 행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페미니스트를 바라보는 뭇 사람들의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괴짜다.

유난이네.

누가 알아준다고 힘들게 그래.

너 하나 그런다고 세상이 얼마나 바뀔 거 같아?

 

  누군가가 채식주의자든 페미니스트든 가장 힘든 건 주변 사람들의 냉소가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괴롭거나 힘든 일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 신념을 거스르는 게 더 힘든 법이다.

  너무나도 쉽게,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내가 먹고 있는 음식 하나에 얼마나 많은 코드가 담겨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내 눈 앞에 놓인 음식은 그저 내 배를 채우고 만족감을 선사하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수많은 의미들을 읽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삼키던 걸 잠시 멈춘 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무엇인가를 먹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삼킬 수는 없게 된다.

  지금은 채식을 하고 있지는 않다. 바깥에 있는 시간이 길거나, 일정 상 시간이 없으면 아무래도 채식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저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을 갖고 계속 실천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채식을 시도할 예정이다.

 

  페미니즘 내에서도 비주류인 생태주의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성주의와 관련된 논문들을 섭렵하던 중, ‘여성주의와 채식주의라는 논문을 읽게 된 것이 계기였다. 기존의 생태여성주의의 한계점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채식주의적 생태여성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논조의 글이었다.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페미니즘이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학문이라면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그 사고의 확장판 같았다. 미소지니스트(Misogynist)들이 남성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우월하고 강한 남성열등하고 약한 여성으로 인간을 구분해왔다면, 종차별주의자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을 대립된 것으로 바라본다. 그들에게 자연은 인간에게 종속된, 개발의 대상일 뿐이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철폐하자고 외치면서 그 외의 억압은 도외시하는 것은 일종의 위선이 아닌가 싶었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탈식민주의는 서구-문명-남성적VS()서구-야만-여성적과 같은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나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경험이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토대로 크게 작용했다.

  대학교 1-2학년 때 외국인 유학생을 도우는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아시아 출신의 여성들이었다. 어쩌다보니 터키에서 온 유학생과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어 그 친구의 친구들과도 같이 어울리고, 방학 동안 터키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내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던 무슬림에 대한 편견을 마주하고 깨트리는 데 아주 크게 작용했다. 이전까지 나는 무슬림 여성들을 수동적이고 억압받는 피해자라고만 생각해왔다. 물론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기만 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일례로 내 친구의 가족과 그 친척들의 모습을 보자면, 집에 손님이 왔을 경우,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 모여 밥을 먹는다. 얼핏 들으면 식사자리에서도 차별과 억압이 행해지는구나 싶겠지만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 남자들은 좁은 방에서 식사만 하는 반면, 여자들은 넓은 방에서 요란스럽게 식사시간을 즐기고는 했다. 손님이나 친구를 초대하여 흥을 나누는 것도 주로 여자들이다. 또한 난 그전까지 무슬림 여성들이 담배 피는 걸 상상도 못했는데, 다들 담배도 거리낌 없이 피우고, 신나게 엉덩이춤도 추고, -오신하지 못하게 서로 발길질을 하며 노는 것이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보며 내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물론, 터키가 세속국가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해 자유로운 면이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슬림 여성들에게서 수동적이고 억압받는 피해자의 이미지만을 투영하는 것은 지나치게 서구중심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다.

 

(▲ “Your Body is a Battleground”,1989, ©Barbara Kruger/The Broad)

   

  탈식민주의는 어떤 지역 간, 국가 간의 역학관계에서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여성의 몸은 전쟁터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1980년대에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외치며 나온 구호이다. 탈식민주의의 관점에서도 이 말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 식민주의 담론 중 하나가 자연’, ‘순수로 대표되는 피식민지 지역을 근대화된 서구의 손길로 정복하고 문명화하는 것이 계몽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몸을 남성, 그리고 남성중심주의의 사회가 식민화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역시 탈식민주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가 타투(Tattoo). 나는 타투에서 몸의 정치학에 해당하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사회가 만든 아름다움을 위해 여성이 성형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는 신체변형은 자연스러운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러한 미의 기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그림을 그린다든가 피어싱을 하는 등의 신체변형(Body Modification)’추한 것’,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이러한 편견과 낙인은 특히 여성에게 더욱 엄격하게 작용한다. 때문에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타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요새 구상하고 있는 타투 디자인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에 메두사의 얼굴을 합친 것이다. 모두가 숭상하는 미의 상징인 비너스에 쳐다보기만 해도 온 몸이 돌로 굳는 추한 메두사의 얼굴의 조합이라니, 정말 멋지지 않은가!

 

 

 

이 글은 이슬(YouTube ‘페민이스트계정 운영자)’님의 사연을 바탕으로 구성됐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이슬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퀴어 페미니스트, 이하제


최존

 


  “여자애가 단정치 못하게 그게 뭐니?”

  “얘가 말하는 것 좀 봐? 그게 여자애 입에서 나올 소리야?”

  “, 넌 축구 빠져. 여자잖아.”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날이 가면 갈수록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억압과 제재를 가하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무얼 잘못한 것일까?’

 

  천성이 순종적이고 체제-순응적이었기에 고민은 나날이 깊어졌다. ‘여자에 관한 책을 읽으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권장도서목록의 여자혹은 여성이 들어간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책들이 딱히 내 고민을 해결해준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더러는 여성혐오 범벅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아주 쓸모없는 노력은 아니었다. 나의 독서는 자연스레 페미니즘에 발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제야 답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찮은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차별, 혐오, 멸시, 평가는 내가 갖고 태어난 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반된 두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 모든 게 내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서러움이었다. 내가 보지를 갖고 태어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차별받아야 했다.

  남은 감정은 분노였다. 혼자 겪고 배운 페미니즘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연대할 동료 페미니스트도 없었기에 더욱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표출했다. 아무리 내가 분노하고 싸워도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다. 좌절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또래 친구들과 나를 분리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잇다는 우월감이라도 두르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이전까지는 내가 퀴어라는 것과 페미니스트인 것은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논바이너리[각주:1] 트랜스젠더(Non-binary Transgender)라도 정체화한 이후, 여성학과 퀴어 이론의 교차점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을 퀴어-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한 이후 여러 가지가 변했다. 이를테면 퀴어 뿐만 아니라 가난과 장애, 아동-청소년, 외국인이나 이주노동자 등 다른 소수자성이나 소수자성 간의 교차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소수자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좀 더 깊은 층위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비소수자성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권력에 무지하고, 혹 알지라도 쉽게 간과하고는 한다. 페미니즘 진영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같은 퀴어-페미니스트들, 소수자성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기존의 시스젠더[각주:2] 헤테로 알로섹슈얼[각주:3] 페미니즘을 할 때 배제되었던 여성들을 페미니즘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페미니즘을 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메갈리아 탄생 이후 페미니즘 논의는 일상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퀴어, 그리고 퀴어-페미니즘에 관련해서는 지지부진하다. 20대 이하의 젊은 세대의 인식이 기성세대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아직 멀었다.

  앞으로 전공을 살려 여성과 퀴어를 대상으로 한 심리학 연구를 진행하고 싶다. 심리학 역시 굉장히 남성중심적인 학문이라, 프로이트의 연구를 비롯한 초기의 많은 실험에서 여성은 실험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여성 역시 피실험자가 되고, 관련 논문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나 역시 퀴어-여성(혹은 여성으로 패싱[각주:4]되거나 지정성별이 여성인 사람)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다. 지금까지 가시화되지 않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정체성에 대해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싶다.


  흔히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그렇지만 내 이름 석자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보다도 내가 연구한 분야가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고, 내가 세상에 왔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 퀴어-페미니스트 이하제의 지향이다.

 

 

 

이 글은 이하제님의 사연을 바탕으로 구성됐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이하제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여성과 남성 이분법에 해당되지 않는 모든 젠더 정체성을 말한다. <출처: 젠더 Wikia> [본문으로]
  2. 성별 정체성과 지정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유성애자. 성욕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적행위에 대한 끌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성욕 유무와 상관없이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Asexual)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출처: 에이로그 ALOG 네이버 블로그> [본문으로]
  4. 어떤 사람의 외적 모습이 사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성 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출처: 한국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럭키 퀴어 페미쇼(LUCKY QUEER FEMI SHOW)

 

최존

 

 

  나는 퀴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시스젠더[각주:1] 레즈비언 알로섹슈얼(Cisgender Lesbian Allosexual)[각주:2]이고, 굳이 성적 지향성을 숨기지 않는 공개적인 레즈비언(Openly Lesbian)’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여성이자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나는 꽤나 두드러진 소수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제약과 차별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퀴어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나를 용감한 사람이라 여길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내가 페미니스트였던 것도 아니고, 두려움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처음 커밍아웃했을 때였다. 가장 친한 친구라 여겼던 옆 반 남자아이에게 내가 여성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 애는 표정이 싹 굳은 채, ‘남자와 안 자봐서 그렇다며 나를 교정강간하려 했다. 그 이후, 그 애는 나를 철저히 무시했으며, 지나갈 때 침을 뱉기도 했다. 그렇게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운 좋게도,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은 나의 성적 지향성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엄마께 커밍아웃하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엄마, 만약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면 어떻게 할 거야?”라고 얘기를 꺼냈다. 엄마는 내가 임신한 줄 아시고 괜찮아. 네가 낳고 싶으면 낳아도 되지만, 감당할 수 없으면 병원가자.”라고 하셨다. 내가 엄마, 그게 아니라 나 여자를 좋아해.”라고 했을 때, 엄마는 왜 그런 걸로 울면서 진지하게 얘기하냐? 난 너 애 가진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라며 무색할 정도로 나의 커밍아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셨다. 엄마의 반응은 세상 모두가 내가 레즈비언인 걸 알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큰 용기를 주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이 제시하신 주제는 한국에서는 왜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지 않을까?’였다. 한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동성애자는 에이즈를 유발시키기 때문입니다!”

  교수님께서 그건 학술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논거라고 지적하시자, 그는 동성애는 사회적 혐오를 조장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맙소사! 너무나도 확신에 찬 그의 대답, 부끄럼 한 점 없는 당당한 그의 태도에 나는 경악했다.

  “이 반에 분명 성소수자가 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부끄럽지 않으세요?”라고 내가 묻자, 그는 주춤하더니 , 그럼 본인이?”라고 되묻고서는 자리에 앉았다.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그도 그였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조용히 살고자 했건만, 교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호모포비아적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나는 교내에 성소수자 인권동아리를 창설했고, 활발히 활동했다.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비교적 별 탈 없이 확립한 것에 비해, 페미니즘에 입문한 것은 조금 늦은 편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해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수적으로도 소수이기 때문에 더욱 뚜렷한 퀴어로서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담론은 매우 긴밀하고 중요하게 느껴졌지만, 여성은 인구의 절반인데다 여성이기에 받는 억압은 내가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퀴어로서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삶은 분리되어 있었다. 그랬던 내가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교 2학년 때 수강한 문학과 여성이라는 수업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억압을 다루는 문학작품을 공부하면서 젠더 위계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받는 억압과 성 역할에 갇혀 스스로를 억압하는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 전까지 나는 철저히 젠더 코르셋으로 스스로를 조이고 있었다. 각각의 성에 걸맞은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화장을 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고,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거나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건 여성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타고난 성별과 성적 지향성 때문에 차별받아선 안 된다고 주장해왔던 내가, 특정 성별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행동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 이후부터 나는 퀴어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생각해왔고, 스스로를 퀴어-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해왔다.

 

  여성이슈를 바라보는 데 있어 시스젠더 헤테로[각주:3]-알로섹슈얼(Cisgender Hetero-Allosexual) 페미니스트와 퀴어 페미니스트 간 차이가 존재하는지 묻는다면, 본질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퀴어로서 받는 차별과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은 다르지만,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성 카테고리 안에서도 퀴어 여성, 장애인 여성으로서 또 다른 차별을 받는 이들이 존재하고,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에서 소외될 수 있는 이러한 영역까지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퀴어-페미니즘의 의의가 있다고 본다.

  몇몇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게이 커뮤니티에 여성혐오적 분위기가 만연한 건 분명하다. 그러나 여성혐오가 게이 커뮤니티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게이를 똥꼬충과 같은 단어로 비하한다든가, 아웃팅을 시도한다든가, 혹은 레즈비언을 무조건 성역화하는 등의 태도로 대응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혐오는 그들이 게이여서가 아니라, ‘한국남자이기 때문이고,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갈 길이 매우 멀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수 있다. 갑자기 일어난 변화가 아니다. 퀴어의 존재를 아예 인지하지 못하거나/않거나, 내 주변에는 없는 별난사람들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곤 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가장 작은 단위인 커밍아웃을 통해 기존의 인식을 깨부수는 데 동참하고자 한다.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종로에서 게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폭행을 당한 사건만 봐도, 퀴어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정말 많은 위협에 노출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신변에 위험을 느낀 적은 없지만, 나 역시 간담이 서늘했던 적은 있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가 없던 시절,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를 만들고 회원을 모집하는 데 어쩔 수 없이 포스트잇에 내 전화번호를 써서 붙이고 다녔던 적이 있다. 그 때 익명의 문자가 한 통 날아왔는데, “, 진짜 더러워.”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전화번호를 어디에 뿌리고 다니더라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그저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모욕당하는 현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렇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걸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면 더더욱 내가 설 자리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나는 운이 좋은 경우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 가족과 공통된 관심사를 가졌기 때문에, 혹시라도 내가 빻은말을 하는 경우에는 지적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한 번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얘기해보길 추천한다. 일상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다양하다. 무엇보다 뜻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와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더 많은 페미니즘 웹진, 퀴어 웹진이 발행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하고 싶은 건 많다.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도 되고 싶고, 등단도 하고 싶고, 페미니즘 담론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시도 쓰고 싶다. 무엇보다도 젠더 인식에 있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일조하고자 한다. 때문에 나는 퀴어-페미니스트로서 계속 사람들에게 를 말할 것이다.

 

   

이 글은 사월님의 사연을 바탕으로 구성됐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사월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성별 정체성과 지정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유성애자. 성욕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적행위에 대한 끌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성욕 유무와 상관없이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Asexual)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출처: 에이로그 ALOG 네이버 블로그> [본문으로]
  3. 이성애자. [본문으로]

사람들이여, 페미행 급행열차를 타라!

 

최존

 

  ‘전명남(전직명예남성)’시절, 우습게도 스스로를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곤 했다. 순전히 페미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탓이다. 그 시절 나에게 페미니즘은 올바른 페미니즘올바르지 못한 페미니즘으로 나뉘었는데, 내 인식 속에서 한국형 페미니즘은 후자의 범주에 들었다. ‘올바른 페미니즘올바르지 못한 페미니즘’, ‘한국형 페미니즘이라지금 생각하면 코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그 때는 그랬다. 어린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거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었다. 선생들은 여자들은 권리를 외치기 전에 의무부터 수행해야 한다.’라거나 서양의 페미니즘은 여자도 더치페이를 하고 군대에 보내달라고 아우성인 평등사상인데 한국에 와서 변질되었다.’는 류의 헛소리들만 해댔다. 가장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은 여성혐오가 만연한 상태인데다 마치 사실인 마냥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악질적인 루머가 곳곳에 퍼져 있었다. 핑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을지는 누구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내게 페미니스트, 그 중에서도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불리할 때만 자신의 약함을 얘기하는 비겁한 사람들이었다.

 

  그랬다. 나는 꽤나 골 때리는 전명남이었다.

 

  “, 양성평등하려면 여자도 군대 가고 데이트 비용은 반반 딱 나눠서 내야 하는 거 아냐? 너희 왜 남자한테 의존하려고 해. 떳떳하게 살아!” 이렇게 말하고 다녔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평등이라는 글자에만 집착하여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여자와 남자는 같은 사람임을 말하면서 왜 굳이 여자를 사회적 약자에 포함시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자신이 약자 그룹에 속하지 않기를 바랐다. 때문에 도와주겠다는 남자의 말을 까칠하게 거절한 채,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힘에 부치는 짐도 내가 들었다. 썸타고 있던 남자애에게 무개념녀로 인식되기 싫어서, 헤어지고 나서 그 무리에게 , 그 김치녀?”라고 회자되기 싫어서 항상 자기검열을 했다. 내 숨통을 옥죄는 코르셋의 줄을 내가 당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게 잘못된 줄 몰랐다.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나.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정에서 태어나,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가장 보수적이라고 칭해지는 중동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거주했을 당시, 아버지는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항상 옷차림이 같았지만 어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전신을 가리는 아바야를 착용해야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와 같이 운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면허가 있음에도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머니는 점차 무력해져갔고,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 무력감과 우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보다 여권이 지극히 낮은 국가이고, 그 때의 체험은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진 예외의 것이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한국사회 역시 뿌리는 다르지 않았다. 가장이라는 말의 힘인지는 몰라도 아버지를 대하는 건 항상 어머니를 대할 때보다 어려웠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노고만큼이나 가정을 운영하는 어머니의 노고 역시 대단한데도, 아버지의 권위는 제일이었으며 아버지의 말은 어머니의 말보다 항상 앞섰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을 뿐더러 보통 다들 그렇게 사니 으레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남성은 군대도 가고, 데이트할 때나 결혼할 때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고들 하고, 보통 요즘과 같이 맞벌이 부부가 많지 않았을 때의 인식이다결혼 후에는 가정의 생계를 전담하여 책임지니까 부당하더라도 그들이 의무를 더 많이 지는 만큼 권리도 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군역의 의무를 지고, 똑같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부장제의 병폐를 알면서도 그 화살을 사회가 아닌, 나를 포함한 여성에게 돌렸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것은 항상 어딘가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던 중 우연히 메르스갤러리 저장소페이지의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호기심이 생겨 페이지의 게시물들을 쭉 정독했다. 유레카는 이럴 때 외치는 말일까? 그동안 불편했던 감정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는데, 굳이 나 스스로를 개념녀프레임에 맞추느라 버거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여자인 내가 아니라 여자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사회를 손가락질해야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런 해방감은 흔치 않았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작년부터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면서 요새는 메갈리아미러링에 대해 여혐VS남혐따위의 겉핥기식이 아닌, 비교적 심도 있는 기사들도 늘고 있다. ‘미러링이 의도된 전략이든 그동안의 미소지니에 참아왔던 여성들이 우발적으로 터뜨린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든 이제는 중요치 않다. 우아한 언어로 조리 있게 페미니즘을 말하던 여성들에게 콧방귀 뀌던 남성들이 너의 자지는 작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페미니즘이 이렇게 이슈 차트를 역주행하고 있지 않은가.

  메갈리아를 기점으로 페미니즘에 입문하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나와 같은 짜릿한 순간이 적어도 한 번씩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러링의 의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갓스시녀들이 ‘#남녀가뒤바뀐일본사회(#男女逆転した日本社会)’ 해시태그에 열광하며 그동안 여성으로서 겪었던 부당함과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건, 미러링이 악질적인 김치녀, ‘페미나치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제 막 페미니즘을 배우고 있는 중이고, 태어났을 때부터 노출되어왔던 탓에 나 역시 미소지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페미니즘을 지향하고부터 더욱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옥죄고 틀에 맞추기 위해 힘들이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요새 가장 따끈따끈한 내 인간관계인 연애에서도 볼 수 있다. 내게 있어서 연애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랑하는 연인과 편하고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자랑 좀 하자면, 운 좋게도 애인 역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인지라 페미니즘의 정서를 함께 공유한다. 내 인생에 있어 요즘과 같이 자존감이 높고 동시에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던가!

  혹자는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 내지는 여성우월주의 아니냐고 한다. 확실히 페미니즘의 시작은 억압받는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페미니즘 이름 아래 수많은 목소리들이 있지만, 이러한 부조리의 근본적인 원인이 가부장제인 것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이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하에 이뤄지는 모든 성차별과 고통에 반대한다. 당신이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즘에 적대적일 이유가 없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페미니즘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홍달님의 사연을 바탕으로 구성됐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홍달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친 여자’가 될 바에는 ‘화난 여자’가 되겠다. 

- 어느 ‘전명자’의 수기

  


  나는 지금껏 여성혐오를 하지도, 경험하지도 않았다.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8살부터 남자애들과 같은 반을 썼던 16살까지 학번이 항상 남자애들부터 시작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모든 반이, 모든 학년이 남자부터 시작했으니까 원래 그러려니 했다.

  유독 2차 성징이 일찍 오고 남들보다 발육이 빨랐던 내게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은 이제 시집가도 되겠어.’라는 말을 마치 덕담인 마냥 한 마디씩 했다. 내가 신체적으로 성인의 외형을 갖춰나가는 게 어째서 시집가는 것과 연결고리가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의 빠른 성장에 그들이 감탄한 것뿐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생활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쓰기 위해 참가한 교내 양성평등글짓기 대회에서 나는 진정한양성평등을 위해선 꼴페미스러운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글을 썼다. 언론에서는 이라느니 알파걸이라느니 성공한 여자들 얘기만 나오던데 어째서 페미니스트들은 현실과 맞지 않는 여성주의인가, 이건 여성우월주의이지 양성평등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한 국어 선생님이 이대생이 사치스럽고 개념 없는 된장녀로 대표되지만, 한편으로는 악바리같이 공부만 하고 남자들한테 의존하지 않는 애들도 많기 때문에 진학을 추천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여대 진학을 희망하지 않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어쩌다보니 생각지도 않게 여대에 입학하게 되었고, 사촌오빠와 앞으로의 진로 방향과 취업이 어려운 작금의 세태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그래도 너는 학벌도 좋고 얼굴이 예쁘기라도 하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 학벌과 용모가 나쁘지 않은 것이 취업의 어려움을 타개해줄 열쇠도 아닌데 심지어 두 가지 조건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수두룩한데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취업할 때 학벌과 용모가 중요하다고들 하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괜찮았을까?

  아니, 안 괜찮았다. 괜찮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페미니즘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관심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대학에 와서 처음 접하게 된 고전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과 영화를 봤던 것이 아마 가장 첫 단계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대생의 범주에 내가 속하게 되었을 때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성차별은 나의 좁디좁았던 시각을 넓혀주는 동시에 분노 게이지를 점점 상승시켰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나를 전향하게 한 방아쇠는 장동민 사건이었다.

  ‘장동민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도대체 이 인간은 어떤 뇌구조를 가졌기에, 저딴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인가싶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남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서 여러 커뮤니티를 눈팅했다. 그런데 세상에, ‘무개념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여자연예인들은 가루가 될 때까지 그토록 까던 사람들이 장동민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거나 엄청난 쉴드 방벽을 치고 있었다. 장동민이 뭐라고 저렇게 궤변을 늘어놓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동안 다른 이슈들에 대해서는 비슷한 의견을 공유하던 사람들이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유지하고자, 위협이 되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폭언을 하고, 신상을 터는 것을 보며 나는 환멸을 느꼈다.

  ‘메르스 사태로 몸서리치며 분노하던 어느 날, ‘메르스 갤러리라는 게 생겼다는 것을 들었다. 무슨 이슈 하나 생기면 그 이름을 딴 갤러리가 디시인사이드에 생기기 마련이라, 처음 이름만 들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 갤러리, 단순히 메르스 사태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아니란다. 찾아보니 홍콩행 비행기에서 메르스 의심 증상을 보이던 한국 여성이 격리 조치를 거부해 메르스를 퍼뜨렸다는 루머가 온라인을 달궜는데,[각주:1] 알고 보니 이 기사는 오보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한국 여성을 싸잡아서 욕하고 폄하하는 한남들에게 똑같이 돌려줌(미러링 스피치)’으로써 여성혐오와 억압의 현실을 드러내는 실험의 장이었던 것이다.[각주:2] 활동에 제약이 생기자 메갤러들이 따로 사이트를 만들어 떠난 곳이 메갈리아였다.

  ‘미러링 스피치에 코르셋을 찢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는 많은 이들과 달리, 나는 처음부터 메갈리아의 언어에 환호하지만은 않았다. ‘미러링이라는 개념을 얼핏 들었음에도 그들의 거친 표현에 선뜻 납득하기가 두려웠고, 무언가 모를 쾌감과 동시에 , 이래도 될까? 이게 맞는 걸까?’하는 자기검열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친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당황한 모습과 경계, 곧이어 이들을 남자도 사귀어보지 못한 루저, 메퇘지들이라고 매도하고 모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모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도 주저하고 이래도 되는 건지 고민했건만, 그들은 본인들이 가했던 여성혐오(Misogyny)’의 추함에 대해서는 파렴치하게 외면한 채, 우리들의 언어를 문제 삼았고, 더러는 여혐남혐의 구도로 몰아갔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심도 있게 공부하고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새 학기가 되자마자 학교 여성학 동아리의 모집 포스터를 찾으러 다녔고, 궁서체로 외않되?’라고 쓰인 유인물을 보자마자 실소를 터트린 채 바로 지원문자를 보냈다.



  ‘전명자(전직 명예자지’)’였던 나는 이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고,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생각보다 페미니즘은 방대하고 복잡한 학문이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더욱 내 안의 여성혐오와 마주치고 싸우게 되면서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좌절하기도 하고, 간혹 내가 너무 날을 세운 것은 아닐까?’하는 반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여성혐오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걸쳐있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심지어 요즘도 놀라울 정도로 내 안의 새로운 여성혐오를 발견하고는 한다미처 나의 성별이 받고 있던 부당한 대우들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성별 위계 권력층의 생각에 때때로 동의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부정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흑역사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부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종용했던 사회에 내가 너무나 잘 적응했던 탓이다. 중요한 건, 과거의 나를 그대로 인정하되, 이를 자각하고 타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와, 그리고 나 자신과.

  우리는 더더욱 목소리를 내고,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억압하는 것들과 싸워야 한다. 인류의 발전이나 윤리의 진보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밤새 시험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해당할까 떨지 않는 행복을 위해, 한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잘 수 있는 행복을 위해서이다. 눈감고 귀닫고 권력구조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 매일 마주치게 되는 여성혐오라는 골리앗과 싸우는 것보다 조금 더 편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문학 속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미친 여자들의 계보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화를 내겠다. 더더욱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할 것이다.

 

* ‘페니스정확한 표현은 팔루스가 맞겠지만 어감 상 이 단어를 채택했습니다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여성혐오를 뜻하며, 이를 거세한다란 내 안의 여성혐오를 깨닫고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꼭지 소개>

과거 명예자지였다가 페미니스트로 전향한 필자를 비롯하여, 전직 명예자지(‘전명자’)였던 혹은 개념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일종의 계기를 통해 코르셋을 찢고 나온 이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칼럼을 작성하는 꼭지입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이제 막 입문하신 분들의 마음()’을 얻고 싶습니다.

 

<필자 소개>

최존: ‘새끼페미’. 세상사에 얇고 넓게 관심 많습니다. 미식가이자 위종대왕이라 불릴 만큼 대식가. 코스메틱과 패션, 역사, 영화, 음악, 배우들에 관심 많은 잡덕. 요새는 아이돌에도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비둘기와 양파를 싫어하고 세균강박증이 있습니다. 필명 뜻은 독자 분들께 맡길게요.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082147005 [본문으로]
  2. 정현희, 「왜 메갈리아는 ‘게이 논쟁’을 필요로 했는가? : ‘성차’와 ‘여성 정체성’의 모색과 한계」, 『2016 제 8회 LGBTI 인권 포럼』, 2016, 1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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