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뭐냐고 물을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 지금은 구하기 힘든 서적을 중고서점에서 싼 값에 샀다고 좋아하는 페미니즘 오타쿠가 됐다. 나 혼자 죽을 순 없고 같이 죽자는 일념 하에 많은 이들을 여성학의 길로 이끌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너 때문에 인생 망했다며 나와 동고동락하는 사이로 남았다.

  나는 어떻게 페미니즘의 자도 모르는 사람들을 이끌어올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데 적당한 도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유혹적인 페미니즘 입문서들은 읽어보는 즉시 왜 스테디 셀러인지 이해가 간다.

페미니즘에 막 관심이 생겨 읽고 싶은 독자들이여, 이 책들에 주목해보자.

 

해쉬태그 #페미니즘_교과서 #한국사회 #젠더_인식

 


          

(▲'페미니즘의 도전' 구판과 신판, ©알라딘)

                                             

한국 페미니즘의 교과서, <페미니즘의 도전>


  처음 읽었던 책은 <페미니즘의 도전>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여성학 동아리에서 나이와 학년에 상관없이 내게 존대어를 쓰는 선배들을 보고 반했는데, <페미니즘의 도전>은 그 멋진 선배들이 추천해준 책이었다.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이 될 정도로 꾸준히 사랑받는 책이다.

  본인이 한참 연애를 하고 있는 20대 여성이라면 사랑과 섹스라는 파트에 먼저 관심이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내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층위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도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어머니, 노인, 연애, 가정폭력, 성매매, 군사주의, 남성성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독자가 젠더로 사회 문제를 사고할 수 있도록 인식을 심어준다.

  한 챕터를 넘길 때마다 당연하게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젠더차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가히 큰 충격이었다. 더 충격이었던 점은 내가 아예 모르는 것들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본인이 접한 한국 사회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아 그게 차별이었구나를 쉽게 곱씹을 수 있다. 왜 스테디 셀러인지 알 것 같았다.

  저자 정희진은 다른 여성학 총서에서도 그가 쓴 글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연구하는 여성학자이다. 한 번 검색해보는 것도 좋다. 페미니스트 저자의 매력에 빠진다면 페미니즘과 보다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새 여성학 강의', ©알라딘)


저자 덕질 입문, <새 여성학 강의>


  그 다음학기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이 책이었다. 여성학의 정의, 역사, 영화, 여성운동, 섹슈얼리티, 자본주의, , 노동, 국가, 북한사회, 세계 등 총 14장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앞서 소개한 <페미니즘의 도전>보다 주제가 세분화 되어있으며 한국에서 누가 어떤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지 쫙 훑어볼 수 있고,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를 골라 읽을 수도 있다.

  딱 저자 덕질하기 좋은 책이다. 저자 덕질이란 좋아하는 저자의 글들을 모두 찾아서 반복해서 읽고 기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나는 이런 총서들을 통해 저자 덕질에 입문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저자가 쓴 글이 수록된 책을 찾아서 사느라 재산 탕진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렇지만 모든 덕질이 그렇듯,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페미니즘 분야에는 여러 저자가 자신이 연구하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쓴 뒤 묶음으로 집필한 책이 많다.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논문체라 딱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출간 된지 조금 된 책이지만, 초심자의 교과서로 적합한 이유는 쉬운 문장으로, 그리고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컴팩트하게 내용을 풀어내고 있어서다.

  이 책을 펴낸 한국여성연구소는 말 그대로 한국의 다양한 젠더 이슈를 연구하는 곳이며, 동녘 출판사는 페미니즘 서적을 많이 펴내는 곳 중 하나기도 하다.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싶은데 무엇을 읽을 지, 자신이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다면 한국여성연구소나 동녘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을 찾아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구판(직접 촬영)과 신판, ©알라딘)

 

그래서 대체 여성혐오가 뭔데,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이 책은 내가 여성주의를 접한 지 2년째부터 지금까지 세 번을 읽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저자가 표현한 일본의 현실은 한국의 현실, 그리고 여성 전반의 현실에 빗대어 볼 수 있다. 모든 내용이 눈여겨볼 만 하지만, 특히 제4비인기남과 여성혐오는 한국의 일베 문제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한국의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저자는 미우라의 저서 <<비인기남─남성수난의 시대>>(2009)의 내용을 인용하는데, ‘비인기남들이 여성에 대해 헛된 희망을 품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 시니컬한 문장으로 화답한다. ‘인기가 있을 리 없다.’(76) ‘커뮤니케이션이란 달콤한 공감 같은 것이 아니다. 자아를 판돈으로 내건 필사의 줄다리기이다. 그게 싫으면 관계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84)

  저자 우에노 치즈코는 모호하고 산발적인 경험들을 언어화 시켜서 용어로 정의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녀의 위트와 풍자에 매료되었고 여성혐오의 전반적 개념과 사안을 섬세하게 분석하는 것에 푹 빠졌다.

  올해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급부상했다. 누군가 여성 혐오가 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답은 이 책에 있을지 모른다. 여성 혐오는 한 마디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아플 수도 있지만, 읽다 보면 스스로 답을 발견할 것이다(이 책은 최근에 역자후기가 문제가 되었었다. 여기서 소개는 하지 않지만 재미가 있으니 한 번 찾아보시길.)


 

내 언어를 가질 때의 기쁨, 중독적인 입문서들


  내 문제를 내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을 때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 감정을 희열감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나의 유혹에 이끌려온 많은 이들도 이 희열감에 중독되었을 것이다.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것들을 정확하게 사유하고 말할 때, 내가 받고 있던 차별의 실체는 생겨난다. 여성주의나 여성혐오라는 제재 용어 자체도 생소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위의 입문서들은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어서 어물어물 거리는 사람들의 언어를 정돈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먼저 보고 싶은 것부터, 공감할 수 있는 것부터 읽고 말하다 보면 어느새 페미니즘은 내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발 여성주의 서적 표지는 핑크나 빨강으로 안 만들었으면 좋겠다. 글 쓰려고 오랜만에 서적 다시 꺼내봤는데, ‘여성적인색 투성이다. 여성학 책인데 여성학적이지 않은 표지가 언젠간 바뀌길 기대해 본다.

 

 



주목할만한 신간: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알라딘)

강남역 포스트잇을 지금은 서울시청에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필자 소개: 페미타쿠. 만년 라이트덕 인생에 페미니즘에 강려크하게 덕통 당함.

-코너 소개: 여성주의 서적 발굴해서 소개하고 홍보합니다. 물론 저도 잘 몰라서 계속 사다 계속 읽습니다. 이 코너 목표는 멋대로 써놓은 거 같은데 어쩐지~’ 눈이 가고 공감이 가는 코너입니다. 코너 제목이요? 내용을 음미하면서 곱씹기 위한 도입…(이하 생략)

 

 

. 들어가며

 

여성만 성폭행을 당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2012 12 18, 대한민국 형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강간죄의 객체는 부녀, 즉 여성만 해당되었다. 여성은 유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여성만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반영된 결과이다. 강간죄의 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바꾸는 등 이러한 사고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법률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은 여전히 유약하다. 본문에서는 성전환자 관련 판례의 변화와 유사강간죄 규정을 통해 여성을 바라보는 법적 프레임을 분석하고자 한다. 논리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는지, 어떤 편견이 개입했는지 같이 살펴보도록 하자.

 

 

. 성전환자 관련 판례의 변화

 

성전환자 관련 판례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함의를 준다. 첫째,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죄 성립여부를 따지는 과정에서 범죄 행위 사실을 입증하기보다, 피해자가 여성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법적 시각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둘째, 성전환자인 피해자가 여성임을 판단하는 논리 전개에서 여성에 대해 전반적인 사회, 법적 시각이 어떠한지 볼 수 있다.

 

1.    96791 판결

 

먼저 트랜스젠더가 여성이 아니기에 강간죄의 객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한 판례를 보자. 성전환수술을 받은 피해자는 가해자들의 폭행과 협박에 의해 원치 않는 성관계를 했고, 그 과정에서 얼굴에 상처도 입었다. 여러 정황이 피해자의 강간 사실을 입증했으나,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며 피해자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강간죄가 아니라 판결했다.

 

 

 

본래의 내·외부성기의 구조, 정상적인 남자로서 생활한 기간, 수술 후에도 여성으로서의 생식능력은 없는 점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보면 사회통념상 여자로 볼 수는 없다.”

 

 

 

    ▶  본래의 내·외부성기의 구조, 정상적인 남자로서 생활한 기간

 

피해자는 정신적으로 여성에의 성 귀속감을 느껴왔고, 성전환 수술을 받음으로써 외관상으로도 여성적인 신체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그 동안 여러 노력을 해왔던 피해자에게 대법원은 본래 너는 남성이었고, 그렇게 30여 년이 넘게 살아왔으니 여성이 아니야라고 낙인을 찍는다. 판결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전환 수술 전의 그녀를 정상적인 남자라고 지칭하며, 수술 후의 그녀를 암묵적으로 비정상적이라 가정한다.

 

  수술 후에도 여성으로서의 생식능력이 없는 점

 

판례에서 설정한 여성 여부 판단 기준에는 생식능력, 임신 및 출산의 가능여부가 있다. 이처럼 임신과 출산을 해야만 여성으로서 인정될 수 있고, 여성은 임신과 출산의 기능을 할 때, 그 존재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불임여성은 여성이 아닌 것일까? 여성을 출산기계로 인식하는 듯한 판례의 태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2.    2009 3580 판결

 

여러 아쉬움이 남았던 지난 판결에서 10여 년이 흐른 후, 대법원은 트랜스젠더를 여성으로 인정하였고, 이에 따라 트랜스젠더 또한 강간죄의 객체가 된다고 판단했다. 해당 판결은 생물학적 요소뿐 아니라 정신적·사회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성전환자인 피해자를 여성으로 보았다.

 

 

 

공고한 성정체성의 인식 아래 그 성에 맞춘 의복, 두발 등의 외관을 하고 성관계 등 전환된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성전환 이후에도 가족들과의 관계를 유지, 개선해왔으며, 이 사건 피고인도 피해자를 여성으로 인식하여 강간범행을 저질렀다.”

 

 

 

  전환된 성으로서의 역할

 

긴 머리와 치마는 여자, 짧은 머리와 바지는 남자라는 식의 성별 맞춤식 외관은 공공연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성에 따라 분류하며, 카테고리화된 특성에 그 개인이 해당되지 않을 경우 행동에 제약을 주는 태도는 사회 전반적으로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가족들과 관계 유지, 개선 및 피고인의 인식

 

대법원은 피해자가 성전환 이후에도 가족들과의 관계를 유지, 개선해왔기 때문에 그녀를 여성으로 인정한다. 한 개인의 성적 정체성은 가족 구성원들의 인정이 없다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판례는 또한 피고인이 피해자를 여성으로 인식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피해자가 여성임을 입증하는 근거로 든다. 폭력적이다 못해 불편한 논리이다. 사회통념과 보편타당한 윤리를 중시하는 판례가 다른 논리적인 근거도 많은데, 왜 굳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여자로 봐서라는 논지를 갖고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유사강간죄

 

앞서 본 판례들은 모두 강간죄의 객체를 개정하기 이전에 나왔기 때문에, 강간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여성임을 입증하는 것에 치우쳐 있다. 물론 성전환자를 전환된 성으로 인정했다는 측면에서는 큰 의의가 있으나, 유약한 존재인 여성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급급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다행히도 이후 형법 297조는 개정을 통해 강간죄 객체를 여성에서 사람으로 확대했고, 강간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성별 판별보다 강간행위 그 자체를 입증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강간을 바라보는 법적인 관점에는 여전히 한계점이 존재한다. 형법 297조의 2호는 강간죄와 구별하여 유사강간을 규정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구강, 항문 등 신체(성기는 제외한다)의 내부에 성기를 넣거나 성기, 항문에 손가락 등 신체(성기는 제외한다)의 일부 또는 도구를 넣는 행위를 한 사람은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위와 같은 강간과 유사강간의 구분을 통해, 강간죄의 성립을 남성 성기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기에 대한, 성기에 의한 행위라면 그냥 강간죄에 해당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강간에 유사한 행위로서 죄값이 낮아진다. 강간죄의 객체를 사람으로 바꿨으나, 여전히 잠재적인 피해자를 유약한 존재인 여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법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애초에 강간을 개인의 성적자유결정권을 중심으로 판단했다면 어떨까? 성기의 침입이 아닌, 개인이 자유의지에 의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선택권의 침범으로 강간 여부를 판단했다면, 유사강간죄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굳이 형량을 달리 하면서까지 강간과 유사강간을 구별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 침해를 기준으로 강간죄를 통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강간죄 관련 법률과 판례를 통해 사회에 내재된 여성과 성전환자, 강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형법 명문상 강간죄 객체가 여성에서 사람으로 확대되는 등 여성을 대하는 법적 태도에 점진적인 변화는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행법은 여성을 여전히 잠재적인 강간죄의 객체로 판단하고, 남성의 성기를 중심으로 강간과 유사강간을 구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과 강간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존 판례와 법령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젠더의식을 갖고 분석해 보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앞으로의 입법과 법 개정에서 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하길 바란다.

 

 

 필자소개

 

조금이라도 걸리면 다 걸고 넘어지는, 소송대리권 없는 야매 법학도입니다:)

 

  코너소개

 

비록 소송대리권은 없지만, 학부시절 공부했던 법학지식을 토대로 성범죄 관련 판례를 평석하고자 합니다. 판례를 분석하는 시간을 통해 한 사회를 규율하는 법과 판례의 문제점과 이들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것입니다. 수많은 시간들 속에서 법, 판례, 사회적 통념 등으로 굳어진 문제점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고쳐나갈 수 있을지,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 또한 갖고자 합니다!

 

 ‘미친 여자’가 될 바에는 ‘화난 여자’가 되겠다. 

- 어느 ‘전명자’의 수기

  


  나는 지금껏 여성혐오를 하지도, 경험하지도 않았다.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8살부터 남자애들과 같은 반을 썼던 16살까지 학번이 항상 남자애들부터 시작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모든 반이, 모든 학년이 남자부터 시작했으니까 원래 그러려니 했다.

  유독 2차 성징이 일찍 오고 남들보다 발육이 빨랐던 내게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은 이제 시집가도 되겠어.’라는 말을 마치 덕담인 마냥 한 마디씩 했다. 내가 신체적으로 성인의 외형을 갖춰나가는 게 어째서 시집가는 것과 연결고리가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의 빠른 성장에 그들이 감탄한 것뿐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생활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쓰기 위해 참가한 교내 양성평등글짓기 대회에서 나는 진정한양성평등을 위해선 꼴페미스러운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글을 썼다. 언론에서는 이라느니 알파걸이라느니 성공한 여자들 얘기만 나오던데 어째서 페미니스트들은 현실과 맞지 않는 여성주의인가, 이건 여성우월주의이지 양성평등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한 국어 선생님이 이대생이 사치스럽고 개념 없는 된장녀로 대표되지만, 한편으로는 악바리같이 공부만 하고 남자들한테 의존하지 않는 애들도 많기 때문에 진학을 추천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여대 진학을 희망하지 않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어쩌다보니 생각지도 않게 여대에 입학하게 되었고, 사촌오빠와 앞으로의 진로 방향과 취업이 어려운 작금의 세태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그래도 너는 학벌도 좋고 얼굴이 예쁘기라도 하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 학벌과 용모가 나쁘지 않은 것이 취업의 어려움을 타개해줄 열쇠도 아닌데 심지어 두 가지 조건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수두룩한데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취업할 때 학벌과 용모가 중요하다고들 하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괜찮았을까?

  아니, 안 괜찮았다. 괜찮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페미니즘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관심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대학에 와서 처음 접하게 된 고전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과 영화를 봤던 것이 아마 가장 첫 단계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대생의 범주에 내가 속하게 되었을 때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성차별은 나의 좁디좁았던 시각을 넓혀주는 동시에 분노 게이지를 점점 상승시켰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나를 전향하게 한 방아쇠는 장동민 사건이었다.

  ‘장동민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도대체 이 인간은 어떤 뇌구조를 가졌기에, 저딴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인가싶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남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서 여러 커뮤니티를 눈팅했다. 그런데 세상에, ‘무개념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여자연예인들은 가루가 될 때까지 그토록 까던 사람들이 장동민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거나 엄청난 쉴드 방벽을 치고 있었다. 장동민이 뭐라고 저렇게 궤변을 늘어놓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동안 다른 이슈들에 대해서는 비슷한 의견을 공유하던 사람들이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유지하고자, 위협이 되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폭언을 하고, 신상을 터는 것을 보며 나는 환멸을 느꼈다.

  ‘메르스 사태로 몸서리치며 분노하던 어느 날, ‘메르스 갤러리라는 게 생겼다는 것을 들었다. 무슨 이슈 하나 생기면 그 이름을 딴 갤러리가 디시인사이드에 생기기 마련이라, 처음 이름만 들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 갤러리, 단순히 메르스 사태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아니란다. 찾아보니 홍콩행 비행기에서 메르스 의심 증상을 보이던 한국 여성이 격리 조치를 거부해 메르스를 퍼뜨렸다는 루머가 온라인을 달궜는데,[각주:1] 알고 보니 이 기사는 오보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한국 여성을 싸잡아서 욕하고 폄하하는 한남들에게 똑같이 돌려줌(미러링 스피치)’으로써 여성혐오와 억압의 현실을 드러내는 실험의 장이었던 것이다.[각주:2] 활동에 제약이 생기자 메갤러들이 따로 사이트를 만들어 떠난 곳이 메갈리아였다.

  ‘미러링 스피치에 코르셋을 찢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는 많은 이들과 달리, 나는 처음부터 메갈리아의 언어에 환호하지만은 않았다. ‘미러링이라는 개념을 얼핏 들었음에도 그들의 거친 표현에 선뜻 납득하기가 두려웠고, 무언가 모를 쾌감과 동시에 , 이래도 될까? 이게 맞는 걸까?’하는 자기검열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친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당황한 모습과 경계, 곧이어 이들을 남자도 사귀어보지 못한 루저, 메퇘지들이라고 매도하고 모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모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도 주저하고 이래도 되는 건지 고민했건만, 그들은 본인들이 가했던 여성혐오(Misogyny)’의 추함에 대해서는 파렴치하게 외면한 채, 우리들의 언어를 문제 삼았고, 더러는 여혐남혐의 구도로 몰아갔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심도 있게 공부하고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새 학기가 되자마자 학교 여성학 동아리의 모집 포스터를 찾으러 다녔고, 궁서체로 외않되?’라고 쓰인 유인물을 보자마자 실소를 터트린 채 바로 지원문자를 보냈다.



  ‘전명자(전직 명예자지’)’였던 나는 이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고,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생각보다 페미니즘은 방대하고 복잡한 학문이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더욱 내 안의 여성혐오와 마주치고 싸우게 되면서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좌절하기도 하고, 간혹 내가 너무 날을 세운 것은 아닐까?’하는 반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여성혐오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걸쳐있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심지어 요즘도 놀라울 정도로 내 안의 새로운 여성혐오를 발견하고는 한다미처 나의 성별이 받고 있던 부당한 대우들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성별 위계 권력층의 생각에 때때로 동의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부정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흑역사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부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종용했던 사회에 내가 너무나 잘 적응했던 탓이다. 중요한 건, 과거의 나를 그대로 인정하되, 이를 자각하고 타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와, 그리고 나 자신과.

  우리는 더더욱 목소리를 내고,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억압하는 것들과 싸워야 한다. 인류의 발전이나 윤리의 진보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밤새 시험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해당할까 떨지 않는 행복을 위해, 한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잘 수 있는 행복을 위해서이다. 눈감고 귀닫고 권력구조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 매일 마주치게 되는 여성혐오라는 골리앗과 싸우는 것보다 조금 더 편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문학 속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미친 여자들의 계보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화를 내겠다. 더더욱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할 것이다.

 

* ‘페니스정확한 표현은 팔루스가 맞겠지만 어감 상 이 단어를 채택했습니다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여성혐오를 뜻하며, 이를 거세한다란 내 안의 여성혐오를 깨닫고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꼭지 소개>

과거 명예자지였다가 페미니스트로 전향한 필자를 비롯하여, 전직 명예자지(‘전명자’)였던 혹은 개념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일종의 계기를 통해 코르셋을 찢고 나온 이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칼럼을 작성하는 꼭지입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이제 막 입문하신 분들의 마음()’을 얻고 싶습니다.

 

<필자 소개>

최존: ‘새끼페미’. 세상사에 얇고 넓게 관심 많습니다. 미식가이자 위종대왕이라 불릴 만큼 대식가. 코스메틱과 패션, 역사, 영화, 음악, 배우들에 관심 많은 잡덕. 요새는 아이돌에도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비둘기와 양파를 싫어하고 세균강박증이 있습니다. 필명 뜻은 독자 분들께 맡길게요.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082147005 [본문으로]
  2. 정현희, 「왜 메갈리아는 ‘게이 논쟁’을 필요로 했는가? : ‘성차’와 ‘여성 정체성’의 모색과 한계」, 『2016 제 8회 LGBTI 인권 포럼』, 2016, 12쪽. [본문으로]


<여대회담> 시작에 부쳐

 


다른 여대생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대회담>의 시작이었다. 문득 궁금했다. 다른 여대생들은 강의실에서 빈번하게 나오는 교수의 성차별적 발언을, 강남역 살인사건을, 블랙넛의 가사를, 동아리 남자 선배들의 성희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고 떠들고 싶었다.


여자들은 이 세계에서 얼마나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모인다는 정상회담 성비는 5:5가 되지 않는다. 재미있게도, 각국의 청년 패널들을 모아 토론을 진행한다는 포맷의 JTBC 예능 <비정상회담>는 게스트를 제외하면 패널부터 사회자까지 전부 남성이다. 여성 패널이 주로 등장했던 KBS <미녀들의 수다>(20105월 방송 종료)회담이 아닌 수다이다. 등장인물 역시 각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미녀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연설도중 울면 마음약한 여성이, 강한 어조로 연설하면 지독한 여성이 된다. 테레사 메이가 영국 총리의 자리에 오르자 한국의 기자들은 그녀가 낸 정치적 목소리가 아닌 패션에 집중한 기사를 냈다. 우리가 접하는 목소리의 대부분은 남성의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는 쉽게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설 자리를 잃어왔다.

앞으로 <여대회담>에서는 여대생 패널을 모집해 여성주의 이슈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우리에겐 목소리와, 이야기를 할 장이 필요하다. 꼭 유의미한 결론을 낼 필요는 없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여대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이야기를 할 공간과 기록할 면이 필요하다. <여대회담>은 기록의 장이다.

 



 

KBS 예능프로그램 <12>은 대학 특집으로 이화여대 편을 방송한 후 시청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여대생을 으로 지칭하거나 즉석 미팅을 신청하는 등의 모습이 여대와 여대생을 학생이 아닌 대상화된 젊은 여자로만 보았다는 비판이었다. 작년 이맘때 방송한 서울대 편에서 출연자들이 재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거나 퀴즈 대결을 펼쳤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느껴지는 방송이었다.

 



(숙명여대 대나무숲 / Facebook)



 

페이스북 페이지 숙명여대 대나무숲에는 남대가 있다면 남자인 입장에서 남자들은 죽어도 가기 싫어할 것 같은데 여자들은 어떤 이유에서 여대를 지원하나요?’라는 질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학생들은 대학은 공부하러 왔을 뿐이라는 명쾌한 대답으로 맞대응했다.

96년 상명여자대학교가 공학화 하면서 현재 서울 소재 4년제 여자대학은 총 6개이다. 공학인 대학교와 다름없이 공부하기 위해 진학했음에도 여자대학 학생들은 한국 사회에서 학생이 아닌 이자 연애 대상인 듯하다. 여대생에 대한 편견은 어디에나 있지만, 편견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는 장은 없었다.

이에 대해 여자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직접 목소리를 냈다. 1차 여대회담에서는 여자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편견을 이야기해보고자, 서울 소재 4년제 여자대학교 학생들을 대담자로 만났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여대생을 따라다니는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 솔직한 회담자리를 공개한다.

 

 



1차 여대회담 : ‘너 여대 티나’ - 여대생 편견

회담 진행 : 광개토

 



 

Q.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를 포함하여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슾하 : 숙명여대 2학년에 재학 중이다

혜주 : 서울여대 공예학과 16학번. 새내기이다.

슈슈용 : 성신여자대학교 11학번에 다녔었고, 현재는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읭용 : 이화여자대학교 11학번으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Q.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학교의 여성주의 친화력은 어느 정도인가?

슈슈용 : 높지는 않다. 학교 총장 심화진이 여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여성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서라는 요지의 발언을 해 어이가 없었다. (반면) 학교 에브리타임에서는 여성주의 대한 토론이 활발하다. 여성주의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면 공격당하는 분위기도 있다. 교양 수업에 여성학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못 들어봤다.

혜주 : (서울여대) 에브리타임에서도 강남역 사건 이후로 활발하게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한 사제동행 프로젝트라고 해서, 학교에서 지원을 받아 미술대학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여성주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다음 학기부터 참여할 예정이다. 여성주의 강의를 하시는 분은 딱 한 분 계시는데 과목명이 <결혼과 가정>이다. 학생들이 말하길 내 인생 강의라고 지칭한다. 듣고 나서 결혼관과 여성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본인은 너무 유명해서 수강신청을 못 했다.

읭용 : 이화여대에도 여성학 강의가 유명해 수강신청이 치열하다. 3학년 때 쯤에는 학생문화회관에서 보지 그림 전시를 봤다. 설치한 천막 안에 들어가면 다양한 여성 생식기나 가슴, 여성의 몸에 대한 전시를 볼 수 있게끔 했다. 그 밑에 전시품 설명이 있었는데, 학생들에게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게끔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본인도 처음엔 충격적이었는데 보다 보니까 신선하고 좋은 경험이었다.

슾하 : 숙명여대에는 11학년도에 여성학 연계전공이 없어졌다. 작년에는 <여성과 리더십>이라는 수업이 교양핵심 영역 수업 중 하나였는데, 올해는 다 교양선택으로 넘어갔다. 대신에 대형강의로 바뀌고 학생들의 관심이 높아 수강신청 경쟁도 치열한 거 같긴 한데 교양핵심이 아니라 선택으로 변경됐다는 점에서 이전처럼 활성화되진 않는 거 같다. 교수들의 수준도 각각 다르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깨어있는 분들도 계신 반면에 여자애들은 술 마시면 안 돼, 담배 피우면 안 돼라고 말하는 교수들도 많다.

 

 

1.입학

Q.‘여대에 진학하겠다 / 입학했다라는 말을 했을 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혜주 : 재수를 했는데 첫 입시에는 동덕여대를 썼다. 그런데 담당 학원 선생님이 너는 동덕여대랑 안 맞을 거 같은데? 거기 애들은 싸우고 서로 뒷담하고 그러는데네가 고생하지 않을까라고 하셨다. 막상 여대에 입학해 면학 분위기를 경험하고 보니, 그 때 그런 말을 왜 하셨는지 이해가 안 된다.

슈슈용 : ‘성신여대니까 고려대랑 미팅하겠네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페이스북 성신여대 대나무 숲페이지에는 성신여대 학생들 너무 많은데 오빠가 보듬어줄게요라는 글도 올라온다. 우리 학생들은 여대 다녀서 지린내 나는 복학생 선배 안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너 같은 애들이 대숲 분위기를 흐린다라고 욕을 했다.

슾하 :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여대에 입학했다. 재수를 했는데, 한국외대와 숙명여대 중에 고민을 하다 숙대에 입학했다. 숙대는 진학하고 싶은 과였고 외대는 전과를 해야 했다. , 언니가 숙명여대에 재학 중이라 자매장학금을 노린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재수까지 했는데 숙대 밖에 못 가냐 욕을 했고, 친구도 외대를 왜 버리냐고 재차 물었다. 한국외대도 좋지만 전과 과정이 너무 힘들 거 같다고 대답했더니 친구가 요즘엔 회사에서 여대를 안 좋아한다고 했다.

알바를 할 때도 숙대생이라고 말하면 결혼정보회사에서 잘 먹히겠네’ ‘시집 잘 가겠네라고 한다. 대학에 들어왔는데 머리는 똑똑하지만 너희는 결국 남성의 아내 엄마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취직을 못한다는 건 여대에 입학하면 많이 듣는 말인 것 같다.


 

(인터넷에서 떠돌았던 '된장녀' 이미지)

 


읭용 : 이화여대 합격을 했을 때 다들 축하는 해줬다. 그런데 이대 가면 너 명품 같은 거 사야 되는 거 아니냐, 화장도 하고 하이힐도 신고 옷도 가방도 다 명품으로 구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주변에서 계속 그러니까 나 자신도 아 명품을 사야 되나?’ ‘입학하면 다 명품을 몸에 휘두르고 있는 거 아닌가?’ 걱정하게 됐다. 실제 이대생 들을 보지도 않고 말이다. 막상 와보니까 다들 편하게 츄리닝 입고 다닌다. 내가 지금 입은 것처럼. (웃음)

슾하 : 사촌언니들이 다 이대생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 아는 선생님께 이대생들은 다 명품을 들고 다니냐고 물어봤다. 오히려 주변에서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 거 같다.

슈슈용 : 그래서 이대는 된장녀가 많다는 말도 만들어지고.

슾하 : 동문회 나가면 사람들이 숙대의 라이벌이 이대라고 말한다. 이대는 사치스럽지만 숙대는 조신한 이미지를 가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대처럼 된장녀 프레임이 없으니 더 조신하게 지내야 한다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자기 스스로 코르셋을 입고 성녀창녀 이분법에 휩싸여서, ‘난 잘 하고 있으니까 욕먹지 않는 안전지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2.학업

Q.여대생들은 독하게 공부한다? vs 여대생들은 하이힐에 핸드백 들고 풀 메이크업으로 수업을 다닌다?

슾하 :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남녀공학보다 여대 출석률이 높은 걸로 알고 있다. 남녀공학은 남학생들의 결석률이 높다고 한다. 여대생은 그렇게 독하게 공부하는 데도 취업시장에 진입할 수가 없다.

읭용 : 독하게 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 ‘여자가 열심히 하니까 독하다 한다. 남자가 하면 안 그랬을 텐데.

슈슈용 : 공학에서 학점 잘 따는 여자를 보고 학점마녀라고 한다고 한다. 남자들은 여자가 잘나면 못 참는다.

 

광개토: ‘공부를 안 한다는 편견은 어떤가? 예를 들어, 중동 배낭여행 모집하는 광고에 전공 책 하나도 못 들어서 오빠한테 들어달라고 하는 네가 감히 여길 오겠냐라는 카피가 논란이 됐었다. 얼굴 꾸밀 줄만 알지 공부할 줄은 모른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는지?

슾하 : 왜 전공 책을 제본해서 가볍게 들고 다닐 생각을 안 하나. 왜 가볍게 들 생각을 안 하는 건지? pdf 파일도 많은데.

슈슈용 : 요새 전공 책 들고 다니는 사람도 많이 없는데남자들이 여자들을 상상하는 것 같다. 무슨 설화의 주인공처럼.

슾하 : 막상 꾸미지 않고 열심히 전공 공부만 하면, 대학생인데 화장도 안 하냐고 뭐라고 하면서.

읭용 : 예쁘게 꾸미고 싶어서 꾸미고, 전공 책을 손에 들고 나간 적이 있다. 그걸 보고 가방을 큰 걸 들고 다니면 되지, 왜 작은 가방을 매냐고 지적을 받았다. '공부하는 티 내는 거냐'는 거다.

슈슈용 : 힘든 건 난데. 책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게 나은 경우도 있다. 가방이 너무 무겁다.

읭용 : 자기들이 보고 싶은 여대생의 모습만 이야기한다.

 

 

3.연애

Q.여대생들은 미팅을 많이 한다? 연합동아리를 찾아다닌다?

슾하 : 나는 동창들에게 연락을 해서 미팅을 잡기도 하고, 시켜줘서 나가기도 했다. 과 친구들의 성향에 따라 미팅을 하는 빈도는 다른 것 같다.

혜주 : 서울여대 바로 앞에 육군사관학교가 있다. 서울여대를 다닌다고 하면 육사랑 미팅을 많이 하겠다고 한다. 육사랑 미팅 안 해보면 바보, 육사랑 안 사귀어보면 바보, 근데 육사랑 결혼하면 바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가본 적이 없다. 술게임을 못할 뿐더러 일단 가면 돈을 써야 하니까. 만원을 한 번 버려볼까 이런 심정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또 내가 다니는 과는 되게 소수라 선배들과 유대가 없다. 과가 생긴지 60년이 됐는데 엠티를 두 번 갔다고 한다. 작년에 한번 올해에 한번. 선배들과의 유대가 없다 보니까 정말 자급자족이다. 선배들이 미팅을 잡아주는 것도 없고. 가끔 보면 서울여대 학생들보다 정작 외부 사람들이 더 극성인 것 같다.

 

광개토: 이화여대랑 성신여대 같은 경우는 근처에 각각 연대와 고대가 있는데 어떤 이야기가 나오나?

슈슈용 : 자급자족 해본 적도 있고 선배들이 약속을 잡아준 경우도 많다. 11번을 해봤다. 고려대랑도 미팅을 해봤다. 노는 걸 좋아해서 많이 나갔다. 1학년 때 미팅이 부질없는지 몰라서 계속 나갔는데서울여대 분이 현명하시다.(웃음) 처음에는 남자를 사귀겠다고 생각하고 나가는데 나중엔 단순히 놀러 나간다. 번호교환은 몇 번 하지만 그게 연애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이 없다.

읭용 : 미팅을 많이 하는 건 맞는 거 같다. 졸업 전까지 미팅을 100번하겠다고 다짐을 한 친구가 있었는데 일단 50번은 넘은 걸로 알고 있다. 기본적으로 10번이상 해본 친구들도 많다. 연애를 하려고 미팅 하는 애들도 있고, 친구 사귀려고 하는 애들도 있고, 하루 놀러 가는 애들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연애를 목적으로 미팅을 나갔었는데 나중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새로운 사람과 술 마시고 싶으면 나간다.

 

광개토: 여대생이 미팅을 하는 이유는 남자대학생이 없어서, 연애를 하기 위해서라고들 한다. 근데 지금 보니까 단순히 놀러 나가는 거 같은데, 왜 놀러 나가는 걸까?

읭용 : 나는 낯선 사람하고 놀기 위해서다. 새로운 느낌, 신선한 느낌을 얻기 위해. 굳이 남자가 아니어도 된다. 내가 낯선 사람을 만나는 손쉬운 방법이 미팅이기 때문에 미팅을 나간다.

슾하 : 남자를 만나기 위해 미팅을 한다? 아직 대학문화가 이성애 중심구도에 벗어나지 못 했다. 미팅을 나가는 이유는 남성들과 가볍게 놀 수 있어서다. 여자애들은 위험한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취하면 서로 챙겨줄 수 있는데, 남자애들은 취해도 내팽개치고 잘 안 챙겨도 되니까.

읭용 : ‘조신하지 않게술 퍼 마시고 싶은데, 미팅에 나가면 막 남자처럼 먹을 수 있다.

슾하 : 나도 술게임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다른 곳에선 함부로 하지 못하는데 미팅에선 함부로 하고 MC도 한다.(웃음)

혜주 : ‘여대 들어가면 미팅 많이 하겠네이런 말로 학습 당한다고 생각한다. ‘여대 와서 남자도 없다’, ‘여자끼리밖에 없다라는 말을 보면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패배의식을 볼 수 있다.

슾하 : 사회가 특히나 여자의 모든 가치를 결혼으로 연결시킨다. ‘취직 잘해서 결혼 잘 하겠네’ ‘대학 가서 결혼 잘 하겠네’ ‘좋은 이성을 만나면 결혼 잘하겠네여성의 삶을 무조건 다 결혼하고 연관시키는 사회분위기가 존재한다.

 

광개토: 여자대학생은 연애하려고 연합동아리를 들어간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지?

읭용 : 등산 연합동아리를 하고 있다. 이대 등산동아리도 있지만 아까 미팅을 나가는 이유와 비슷하게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의 신선함이 좋아 들어갔다. 이 사실을 말하면 다 등산동아리라는 것엔 집중 안하고 연대랑 연합한다는 것에만 집중한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중앙동아리 들어갈 걸 그랬나.

슾하 : 여대는 여자들뿐이어서 고립되었고, 한 성별 뿐이라 사회성이 없다고 욕을 하면서, 여대생이 연합동아리에 들어가면 남자에 굶주린 것처럼 본다. 남자들이 오히려 여자들 보려고 들어온 경우도 많은데.

 



 

4.대학생활

Q.여대는 남자가 없어서 재미없다?

혜주 : 남자가 없어서 너무 행복하다. 왜냐고? 헛소리 안 들어도 되니까. 여대 학생들은 누가 머리를 안 감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든, 누가 풀 메이크업하고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든 아무 소리 안 한다. 남성이 캠퍼스에 있었으면 분명 화장도 안 하냐 예의가 없다혹은 쟤 너무 꾸민 게 과하다라고 품평을 했을 것이다. 활동 중인 연합동아리 남자들을 보며 확신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평가를 한다. 예쁜 사람한테도, 못 생긴 사람한테도.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자각이 없다.

 

광개토: 여대에는 놀이문화, 특히 술 문화가 없어서 재미없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혜주 : 과마다 다르다. 우리 과는 전혀 없는데, 어떤 과는 신입생 환영회도 하고 선배들이랑 대면식도 하고 MT가서 같이 술도 먹는다고 한다. 동아리 마다도 다 다르다.

슾하 : 여대가 덜 폭력적이라는 걸 반증하는 말이 아닌가? 고대 사발식만 생각해봐도 고대생들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거기서 마시고 토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게 관례처럼 강요되는 건데 문제점을 찾지 못 한다. 여대에서 술을 먹이는 게 없다는 건 그런 강요가 없다는 거 아닌가?

우리 과는 마시기 싫으면 마시지 말라고 강조했다. 40명이 맥주 한 병에 소주 두 병밖에 안 마셨다. 개인의 주량을 고려해주는 것이다. 왜 그게 재미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술 마시는 것 말고 사담만으로도 재미있게 놀 수 있다. 나의 경우 엠티에서 친구들하고 섹스판타지 이야기를 했었다. 남자들이 있었을 때는 맘 놓고 이야기를 못 했을 것이다. 많은 남자들이 여자가 섹스 이야기를 하면 아 얘랑 해도 되는 구나라고 판단하고, 함부로 섹스하자고 하기 때문이다.

슈슈용 : ‘여대가 남자가 없어서 재미없다는 말을 여대가 남자가 없어서 안전하다라고 바꾸고 싶다. 남자가 없어 정말 클린하다.

 

Q.여대는 편 갈라 싸우고 뒷담이 심하지 않나?

슾하 : 편을 가를 만큼 서로에게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슈슈용 : ‘여적여프레임이라고 한다. 동아리 회식을 갔다가 여대가 더 심하다던데 군기 잡는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군기 잡는 건 남자들이 더 심하지 않나.

슾하 : 마리텔에서 간호학과 애들이 너무 편 갈라서 싸운다는 말에 김구라가 싸우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남자끼리만 있어도 그러지 않느냐라고 하는 걸 봤다. 역사적으로는 남자들이 오히려 주도해서 전쟁을 한 게 훨씬 많다. 성별을 왜 나눠서 이야기하는지?

슈슈용 : 페이스북에 툭하면 보적보이야기 하는 사람들한테 자적자라고 하니까 그제야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고 했다.

 

Q.여대생들은 개인주의가 심하다?

읭용 : 개인주의가 있어서 더 편하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가 있어야만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고 그랬는데, 대학에선 다들 개인적으로 시간이 나면 혼자서 공부하고 밥을 먹는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주체적으로 혼자서 할 수 있게 됐다. 개인주의가 필요할 때 개인적으로 활동하고, 서로가 필요할 땐 연계활동을 할 수 있는 건 별개다.

혜주 : 개인주의는 나쁜 게 아니라 자기 할 일을 스스로 하는 거다. 친구들이 여대에서 밥을 혼자 먹냐고 많이 놀린다. 그럼 너는 밥 혼자 못 먹어?’라고 물어본다.(웃음)

슾하 : 여대뿐만 아니라 전체 대학 생활이 개인주의적 성향을 띄지 않나. 고등학교 때는 밥을 먹으려면 최소 두 명씩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대학 와서는 혼자서 뭘 하든 알아서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있다. 공학도 그런데 왜 여대에만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대학문화가 개인주의적으로 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대한테 이기적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우는 게 아닐까?

슈슈용 :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을 배타적인 거라고 생각한다. 여대에선 서로서로 모르는 것도 안 알려준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공부 잘 하는 친구들한테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다 대답을 해준다.

읭용 : 개인주의랑 이기주의를 혼동해서 쓰는 것 같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이 그러니까 나쁜 거라고 하기도 하고.

 

Q.여대생들은 드세다?

슾하 : 과 교수님이 남녀공학의 여학생들은 무거운 걸 들 때는 무조건 남자들을 시키는 반면에 너희들은 너희가 들 수 있지 않냐고 했다. 스스로 하는 여자들에겐 드세다고 하지만 스스로 하지 않는 여자들에겐 멍청하다고, 그러니까 여자들은 안 된다고 한다. 여자들이 뭘 하는 꼴을 못 본다는 말이다.

혜주 : 얼마 전 참여한 농촌활동에서 마늘을 까며 여대생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한 언니는 무거운 캐리어를 별 생각 없이 들었더니 야 여대 티 내지마. 오빠들이 다 해주는데 뭐 하러 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여대 티 난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쓰는 게 화가 났다. 드센 여자가 나쁘기 때문에 여대 애들은 드세고, 여대 티 내는 게 나쁘다는 뜻이겠지.

슈슈용 : 동아리에서 무거운 짐은 내가 그냥 든다. 누군가 들어줄까 물어 보길래 됐다고 했더니 상대방이 너는 연애할 생각이 없냐, 남자가 호의를 베풀 땐 너무 철벽 치지 말고 너무 혼자 다 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했다.

혜주 : 나도 캐리어 들고 가고 있는데 어떤 오빠가 들어줄까 라고 하길래 저도 팔다리 있어요라고 말하고 갔다.(모두 웃음)

 

Q.여대생들은 사치스럽다?

 


 

읭용 : 이대는 ECC라는 곳 안에 스타벅스가 있다. 그 주변에 열람실도 있어서 학생들이 커피를 많이 마시고, 관광객도 많고, 영화관인 아트하우스 모모도 있어서 매출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 역시 이대생, 역시 된장녀라고 말한다.

슈슈용 : <여성혐오의 근원>이라는 책에서 스타벅스-이대생-된장녀가 이어진 이유가 나온다. 스타벅스 처음 입점할 때 이대에 생겨서 그렇다고 한다.

슾하 : 자신의 형편보다 비싸게 소비하는 걸 사치라고 말 한다. 요즘 스타벅스 커피는 비싼 커피도 아니다. 커피 말고도 여자들이 뭘 사는 꼴을 못 보는 거 같다. 외적인 부분을 꾸밀 줄 알고 자기관리를 잘 한다고 볼 수도 있는 건데. 그러는 남자들은 지나치게 꾸미지 않는다. 남자들은 안경조차 바꾸지 않는 경우도 많고, 머리 염색 하나 했다고 우쭐해 한다.

읭용 : 잘사는 학생들이 있긴 있다. 그 학생들은 부모님이 지원해주는 거에 맞게 소비를 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사치를 한다고 생각한다.

슈슈용 : 돈 많은 여대생이 남자가 되면 유정이 되는 건데.(모두 웃음)

읭용 : 여대생한테만 그런 거 같다.

슾하 : 남자는 아무리 사치스러운 시계를 차도 주변에서 별 말 안 한다.

혜주 : 돈 쓰는 게 나쁜 게 아닌데 왜 욕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슾하 :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에 이바지해주는 건데

슈슈용 : 도끼는 돈 쓸 줄 아는 남잔데, 왜 서인영은 된장녀인가? 그녀가 다른 남자들한테 명품을 받았다고 사치스런 된장녀인가? 남자들이 좋아서 준거지. 누가 여자들이 가방 사는 게 사치스럽다 하길래 여자들이 다들 자기 행복에 맞춰서 소비하는 건데 뭘 사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남자들도 비싼 신발 사지 않냐고 했더니 신발은 오래 신는다고 답하더라. 가방도 오래 드는데.

슾하 : 물건의 지속성 측면으로 따져보자면 남자들의 로망이라는 자동차가 제일 떨어진다. 주기적인 관리 비용이 많이 드니까.

혜주 : 나는 만년필을 사 모으는데, 만년필은 한 번 사면 20년 동안 쓸 수 있다. 관리비용까지 합치면 지속성은 만년필이 최고다.

 

 

5.졸업

Q.여대생들은 졸업을 해도 취직 선배들이 끌어주지 않는다던데?

슾하 : 왜 자신들의 엘리트주의와 학연주의를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나. 학연주의는 공정성에 어긋난다. 취직시장이 워낙 경쟁률이 높으니 학연주의를 이용한다 치자. 공학은 남자만 끌어 준다. 지인이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왔는데 여학생은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교수들이 추천서를 잘 써주지 않았고, 성적이 떨어지는 남자들에게 밀린다고 했다. 어차피 취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여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슈슈용 : 같은 성별끼리 경쟁했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편견도 있는 거 같다.

읭용 : ‘여자애들은 후배가 들어와도 잘 끌어주는 게 없다더라. 그러니 너희가 알아서 취업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슾하 : 선배들이 안 끌어준다는 이야기의 실체는 취업한 여자 선배들이 적고, 고위직에 여자가 적다는 현실이다. 현재 한국에서 직장인 여성이 후배를 끌어줄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여성성을 잘 활용해서 입사한 뒤 잘 살아남아서 우리 세대를 바꾸자는 말이 있을까.

 

Q.정말 졸업사진으로 맞선봐서 취집하려고 졸업사진에 목숨 거나?

읭용 : 졸업사진이 나오면 맞선 해주는 마담 뚜쟁이들이 그걸 사간다는 소문이 있다. 예쁜 애들을 골라내서 남자들하고 연결해준다고. 그러나 주변에 아~무도(강조) 진심으로 취집을 위해 사진찍는 친구는 없었다. ‘대학 때 남는 사진이 이거 하나니까’, ‘제일 예쁠 때 인생 샷을 남기기 위해서라는 의견이 많았다.

슾하 : 지인이 실제로 맞선 제안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거 불법인데.(웃음) 취집을 목표로 사진 찍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20대의 기록을 남긴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대학 졸업사진이 마지막 졸업사진이 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옛날엔 여대생들은 부잣집에 시집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아직도 이런 말이 유효하다니.

 



 

광개토: 취집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혜주 : 친구가 언론영상학과인데 수업시간에 충격을 받고 왔다. 교수님이 너네 반드시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어머니가 될 거라는 걸 전제로 깔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학생들이 전혀 반감이 없었다고 한다. 목표는 돈 많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서 행복한 인생 꾸리는 것이란 학생들이 대다수였다는 게 더 놀랍다. 나는 결혼을 할 생각이 드는 것도 신기한데

안전교육을 하는데도 교수님이 아무렇지 않게 나중에 여러분은 어머니가 될 거니까 잘 들으라고 말했다. 에브리타임에서는 결혼 안 할 사람 하면 덧글 터지는데, 주변에도 결혼 안 할 생각인 사람이 대다수고.

슈슈용 : 결혼을 생각하면 자조적으로 이번 생은 망했어이러기도 하는데.(웃음) 취업 준비할 때 너무 힘들어서 취집하면 편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더 부러운 건 돈 많은 백조지만.

슾하 : 나도 자조적으로 취집이나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취집이 제일 어려운 걸 수도 있다. 결혼이라는 건 선택인데 여자들이 마지막 동아줄마냥 생각하게 된 이유는, 워낙 여자가 사회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나마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라도 살고 싶은 걸 거다. 하지만 결혼하면 무조건 안정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도 취업시장에 뛰어들기 만만찮고, 시월드도 있고.

슈슈용 : 주변에서 결혼은 안정적이라고 주입하려는 시도들이 많다. 취업이 힘들다보니 시월드도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혜주 : 취집은 진짜 비참한 선택이다. 자기 능력을 사회에 펼칠 수 없으니까 구석에 몰려서 선택하는 게 결혼이라는 거다. 재수할 당시, 한양대는 경쟁비율이 200:1이 될 정도로 가기 힘든 학교였다. 그런데 재수 담임선생님은 ‘(여자는) 능력 좋게 한양대에 가도 졸업해서 애 낳고 빨래를 한다고 했다. 자기 부인도 한양대 나왔는데 애보고 있다고. 반강제로 결혼이란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다. 비참하다. 얼마나 힘들게 공부하고 졸업했는데. 얼마나 꿈이 많았는데.

 

 

6.‘여대생인 나, 졸업 이후의

Q.‘여대생이란 사회에서 어떤 존재일까?

슈슈용 : 여대생은 시집 잘 가는 애들이라는 보수적인 생각밖에 안 난다.

슾하 : <12일 이화여대 특집>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외부인이 봤을 때 여대생은 어느 정도 지성이 있고 자기를 꾸밀 줄 알고 꽃향기를 풍기는 요정 같은 이미지이다. 반대로 사치부리고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화장이 강한 마녀 같은 이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후에는 엄마가 되어 애들을 잘 가르치고, 남편의 지적인 대화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줄 수 있는 가정의 천사가 되어야 한다. 온통 대상화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여대생은 여혐의 아이콘이다.

슈슈용 : 여대가 금남의 구역이다 보니 호기심을 가진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딱 맞춘 여성들이 존재할 거라고 믿는다. 예전에 한양대생들하고 미팅했을 때, ‘여대생들은 점심 먹을 때 파스타 먹어요?’라는 질문을 받아봤다. 여대생을 대상화하고 본인들의 판타지를 투영하는데 익숙하다.

혜주 : 공예과라고 하면 아기자기한 반지 같은 거 만드는 줄 아나 본데 아니다. 망치 같은 와일드한 공구를 쓰며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을 한다.

슾하 : 남녀공학의 여자대학생과 여대의 여자대학생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여대에는 이데아에 가까운 여자가 있다고 믿는 거 같다.

슈슈용 : 공대여자들은 남성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거 같이.

혜주 : 고백 네 번 이상 못 받으면 여자 아니라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때릴 뻔했다.

 

Q.오늘날 한국에 여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슾하 : 엄마가 숙대도 공학되면 좋지 않냐고 했다. 졸업할 때 남녀공학이 더 좋다고 말이다. 취업시장에서 여자들이 걸러진다는 증거다. 여자들이 고위직에 없는 이유는 여자들이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인구의 절반이 여자인데 여자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초반에 여자들이 걸러지기 때문이다. 취업 시장에서 여자들을 직접 양성해야 그나마 나아질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남녀공학에서는 취업에 여성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 한국 상황에서는 여대가 더 생겨야 한다. 아직도 남자들은 재수시키는데 여자들은 무엇 하러 재수를 시키냐고 한다. 여자한테 덜 투자하는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혜주 : 나는 앞에서 남자가 없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남자들의 헛소리를 듣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광개토: 내가 여중여고여대에서 가장 충격이었던 점은 그룹의 장들이 모두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부회장, 회장, 반장 전부 여자. 여자만 있을 때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혜주 : 서울여대 에브리타임엔 노원지역 학생들이 모이는 노원지역게시판과 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게시판이 있다. 노원지역 게시판, 노지게는 없애야 한다는 말이 많을 정도로 헛소리가 많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가해자가 조현병 환자라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개인적인 문제고, 여성들이 몸조심을 해야 한다는 말이 지배적이다. 서울여대가 공학이었다면 이런 얘기를 지금보다 더 비판 없이 수용했을 것이다.

슈슈용 : 여대를 다닌다고 해서 남성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대 안에서 페미니즘적 사고를 기르기 쉽고, 학습 분위기도 조성되어 있다. 남성들의 일상적인 언어들에 학습을 당할 이유도 없다.

읭용 : 성평등한 사회면 여대가 필요 없을 텐데, 아직까지 그런 사회가 안 됐기 때문에 여자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아직 교육 측면에서, 사회 측면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정말 평등한 사회가 오면 여대가 사라지지 않을까?

 




Q.여대생이 말하는 여대생 / 여대생이 바라는 여대생

슈슈용 : 능동적이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독립적인 것을 위해서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이들이 여대생이다. 1학년 때 가는 엠티에서는 학생들이 남자 없음에 한탄하기도 한다. 학교 모토가 자주성신이다. 자주! 성신! 이러면서 짐을 나른다.(모두 웃음) 짐을 나르면서도 즐거워한다.

읭용 : 주변의 남자들이 성차별적인 이야기를 했을 때 그건 성차별적인 이야기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쟤 페미니스트야?’냐고 묻는다. 아직까진 소극적이지만 이제는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혜주 : 사람들이 하는 말들에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여대생들이 남자들과 대등하게 토론할 때 정말 멋있다라고 생각했지, 남자와 잘 결혼했을 때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슾하 : 현재는 약자지만, 과거의 약자로 남으면 좋겠다. 미래에는 전공을 살려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칼럼을 기고하고 부자인 남자여자들과 다자연애를 즐기며 행복한 삶을 일궈나가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

 




대담 후기

슈슈용 : 김주하씨의 명언이 떠올랐다. ‘이대를 다니면서 이대의 편견을 뛰어넘기 위해서 노력했던 시간이 내 밑거름이 됐다오늘 말을 거칠게 했지만 다음엔 정제된 언어를 가지고 오겠다는 다짐을 했다.

슾하 : 여자로 살아가는 것,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만 생각했는데, 더욱 세분화해서 여대생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읭용 : 이런 걸 주제로 토론한 자리가 처음이었는데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뜻깊은시간이었다. 생각을 깊게 해볼 수 있어 좋았다.

혜주 : 지인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언니 한 명이 화장실을 가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오빠들이 쟤는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했다. 현실에서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여대회담에서는 그런 눈치 볼 거 없이 마음껏 이야기하고 들어서 정말 뜻 깊은 자리였다.

 


우리 오빠가 여혐러일까요? (벌벌)

by.광개토

 



인터넷의 덕밍아웃 서사는 덕후임을 들킨 뒤의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고등학교 친구들 중 몇몇은 내가 더 이상 편안한 덕질 라이프를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소위 말하는 덕밍아웃을 감수하면서 덕질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오빠 사진으로 된 핸드폰 배경화면을 숨기기에 급급하고 언니 사진이 가득한 자취방에 친구를 들일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앞으로 조심해서 덕질을 해야 겠다 마음먹었지만 n년 간 일반인 코스프레라는 걸 모르고 살았던 내가 그리 쉽게 본능을 숨길 수 있을 리 없었다. OT 자리에서 흥이 겨운 나머지 나는 아이돌 덕후임을 밝혔다.

인터넷의 덕밍아웃 서사는 덕후임을 들킨 뒤의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조별 과제에서 대놓고 왕따를 당할까? 나를 뺀 단체 메신저 방을 만들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덕질을 숨기라는 경고가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 덕후임을 숨기지 않는 나를 조롱하거나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덕후인 친구들이 늘었다. 대학은 콘서트를 가든 밤새 아이돌 예능을 보든 상관없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덕질은 대학생활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많은 덕후들을 만나면서 내가 얻은 프리 덕질 라이프가 여대라서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공학에 다니는 친구들은 정말 인터넷에서 보던 덕질을 숨기는 여대생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었다. 아직도 아이돌을 좋아하는 행위를 마치 10대 시절 철없는 여자애들이나 하는 모습으로 격하시키는 사회 분위기가 분명히 존재한다. 숨길 이유가 없는 당당한 취미생활임에도 불구하고 20대 여자들은 아이돌 팬질을 하는 자신을 지운다.

이런 배경을 두고 <디지털 싱글 : 페미아이돌>을 발매해보기로 했다. 이 코너에서는 앞으로 3개월 동안 페미니스트 여대생 덕후가 보는 K-아이돌과 팬 문화를 써볼 예정이다. 디지털 싱글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작지만 꽉 채워서.

 


여성혐오라는 유령이 남자 아이돌 팬덤을 떠돌고 있다.


 

플레디스 소속의 일 년 차 보이그룹 세븐틴은 최근 그룹 리얼리티 예능인 <세븐틴의 어느 멋진 날>을 찍었다. 섬이라는 고립된 장소에서 열 세 명의 멤버들이 직접 식재료를 구하고 요리해 살아남는다는, 일종의 생존기였다. 확고한 캐릭터를 가진 멤버들이 좌충우돌 부딪히며 섬 생활을 해내는 모습은 기존에 볼 수 있던 무대 위주의 방송이 아닌 실생활의 멤버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세븐틴의 인기를 실감한 제작진은 본편을 종영한 뒤 편집본을 이어붙인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내보낸다. 이 비하인드 방송에서 제작진은 세븐틴 멤버들을 대상으로 이상형 올림픽을 진행한다. 제작진이 두 가지 타입의 여성을 제시하면 멤버들이 본인의 이상형에 가까운 여성을 선택하는 형식이었다. 제작진은 순댓국 먹는 여자vs파스타 먹는 여자라는 선택지를 제시하고 멤버들 중 다수는 순댓국 먹는 여자를 선택한다.

선택지가 께름칙하긴 하지만 자신과 식성이 비슷한 사람을 꼽을 수 있다고 양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내가 파스타를 좋아하니까라고 답한 멤버는 소수였다. ‘순댓국을 먹는 여자는 파스타도 먹을 수 있지만 파스타 먹는 여자는 순댓국을 못 먹을 것 같다라는 한 멤버의 발언은 여성을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 고정관념 속에 가둔다. 이제는 오래된 혐오 프레임인 비싼 파스타와 커피를 즐기고 명품백을 밝히는 된장녀를 떠올리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저런 선택지를 제시한 제작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순댓국 먹는 털털한 여자 vs 파스타 먹는 우아한 여자였을까? 순댓국 먹는 우아한 여자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빈약한 상상력인가.

세븐틴의 순댓국은 트위터 실시간 트랜드에 오를 정도로 활발한 논쟁이 진행됐다. 그만큼 여성혐오 의혹(?)은 팬 대부분이 여성인 남자 아이돌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여성혐오 의혹은 현재 인기 고공비행 중인 방탄소년단도 피해가지 못했다. 힙합 아이돌을 표명하는 방탄소년단은 랩 가사는 물론 곡의 프로듀싱 전반에도 참여할 정도로 앨범 제작 참여도가 높다. 특히 랩퍼인 멤버들은 본인의 벌스(verse)를 대부분 직접 작사한다. 이런 상황에서 방탄소년단의 앨범 수록곡 가사가 여성혐오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음식을 눈으로 먹냐 여자애들처럼

사진 좀 찍지 마라 내 입맛 떨어져

-핸드폰 좀 꺼줄래

 

명품백을 쥐기보다는 내 손을 잡아주는

질투심과 시기보단 됨됨이를 알아주는

그런 너와 함께 우리의 미래를 그려봐

-miss right

 


위의 가사를 시작으로 멤버가 낸 믹스테입의 가사가 여성혐오로 지적받거나, 운영하고 있는 트위터 계정에 올린 멘션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의 팬들 중 일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소속사와 방탄소년단에 피드백을 요청하고 있다. 주로 트위터 계정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들은 얼마 전 아이돌로지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내 아이돌이 여성혐오를 한다는 사실도 속상한데, 더 속상한 것은 여성혐오 사실이 팬덤 간 세력 싸움에 이용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아이돌 전성시대. 크고 작은 기획사에서 아이돌들을 데뷔시키고 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아이돌을 예뻐하기도 모자란 시간, 다른 그룹 팬들이 내 아이돌을 물어뜯을 구실을 넘겨주기 싫어서라도 여성혐오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동시에 타 그룹의 멤버가 여성혐오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눈에 불을 켜고 마이너스 덕질을 하는 팬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같은 그룹의 팬들 사이에서도 여성혐오는 민감한 사안이다. 내 아이돌의 행동이 여성혐오적이라는 점을 비판하면 정말 이 그룹의 팬이 맞냐?’는 사상검증이 시작된다. 무조건적으로 내 아이돌이 옳다고 말해야만 하는 폐쇄적인 분위기는 남자 아이돌 팬덤 특유의 아이돌에 대한 높은 충성도와 더불어 위에서 짚었던 것처럼 세력 싸움이나 안티 팬들과의 기싸움과 무관하지 않다. 몇몇 팬들은 여성혐오 지적이 비난인지 비판인지 분간할 힘을 상실했다.

내 아이돌은 절대 여성혐오하지 않지만 네 아이돌은 여성혐오 덩어리임을 입증하고픈 팬들. 여성혐오라는 유령이 남자 아이돌 팬덤을 떠돌고 있다.

 


모두가 여성혐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이쯤에서 짚어봐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과연 여성혐오하는 아이돌은 2016년에 뿅 하고 나타난 걸까? 여성혐오(Misogyny)는 고대 그리스어에 그 뿌리를 둔 단어로 가부장제가 시행된 이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자신의 지정성별이 여성이냐 남성이냐와 무관하게, 어떤 남자에게 여자 친구가 있고 그가 이성애 포르노를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여성혐오는 모두가 수행한다.

한국 가요계도 마찬가지다. 남자 아이돌이라고 해서 여성혐오에 면죄부를 갖고 있지는 않다. 나와 내 친구, 선후배들과 마찬가지로 내 아이돌 역시 여성혐오를 할 수 있다. 그것은 특이하고 이상한 일이라기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여성혐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그룹이 여성혐오를 한다는 사실보다, 아이돌 콘텐츠 속에서 여성혐오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를 헤드라인에 올리는 기자가 비판받듯, JTBC 예능 프로그램 <잘 먹는 소녀들>이 논란에 휩싸이듯 아이돌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팬 역시도 마찬가지다. 몇몇 팬들은 오해하고 있지만, 여성혐오 지적이 아이돌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팬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대중문화,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가 자신이 즐기는 콘텐츠를 비판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방탄소년단의 소속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201676일 다음 공식 팬카페에 여성혐오 논란에 대한 공식 입장을 게시했다. 소속사는 가사와 SNS 콘텐츠 속 여성혐오 논란을 인지하고 사과했다. ‘소속사와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여성혐오 지적사항과 문제점을 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인기 최정상 남자 아이돌 그룹이 여성혐오 비판을 받아들이고 배우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취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구매자() 대부분인 여성을 존중해주겠다는 모션은 역시 구매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던 뮤지컬 업계가 여성혐오 논란에 취한 모션과 천지차이다. 이제 제작자들은 아이돌 콘텐츠를 기획, 제작할 때 페미니즘을 신경 쓸 것이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얼마나 빨리 깨닫고, 젠더 감수성 높은 콘텐츠를 만들어 낼 줄 아느냐가 콘텐츠의 생명력을 담보하는 때가 왔다.

더 이상 우리 오빠가 여혐러일까봐 두려워할 시간이 없다. 내가 느낀 내 아이돌의 여성혐오를 숙고해보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다.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필자 광개토.

광개토대왕님 만큼이나 넓은 (덕질) 영역을 자랑하는 이 시대의 페미니스트 덕후

최근의 즐거움은 세일러문 크리스탈과 오마이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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