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여돌에게 미래란 없다

by.광개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필자가 이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짜리 초등학생들에게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게 할 때였다. 이 말은 이후로 역사 시간이나, 역사적인 날이나, 발화자가 역사적이라고 믿고 싶은 날이나, 기타 등등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줄기차게 소환됐다. 배울 점을 찾아볼 수 없는 말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많다정도의, 소소한 인생의 덕담 정도로 치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민족의 책무를 추궁하는 방망이가 특정인에게 과격해짐을 목격한다.



티파니의 2차 손글씨 사과문

(사진 출처 : OSEN http://osen.mt.co.kr/article/G1110485060 )



역사를 잊은 민족에 대한 푸닥거리가 대대적으로 이뤄지는 815일 광복절이 올해도 돌아왔다. 올해의 희생양은 소녀시대 티파니였다. 그는 일본 공연을 마치고 자신의 SNS에 사진을 한 장 올린다. 이 사진은 특정 앱의 보정을 거친 사진으로, 앱은 GPS에 따라 사진을 업로드한 위치에 어울리는 스티커를 자동으로 부착한다. 티파니의 사진에는 일본 전범기를 떠올리게 하는 스티커가 붙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문제를 깨달은 티파니는 사진을 3분 내에 삭제하지만 대중은 용서하지 않았다. 티파니는 그 뒤로 수기로 쓴 사과문을 두 번 작성해야 했으며, 끝내 출연하던 프로그램인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에서 하차했다.

최근 KBS 프로그램에서는 장동민도 하차한 바 있다. 장동민은 팟캐스트 방송에서 개보년등의 심각한 여성혐오 발언을 하고도 방송에 계속 나왔지만, tvN <코미디 빅리그>에서 한부모 가정 자녀를 희화한 꽁트 이후 두 번이나 논란을 일으킨 연예인을 공영 방송에 출연시킬 순 없다KBS 측의 입장과 함께 당시 출연하던 KBS <나를 돌아봐>에서 하차했다. 이후로도 그의 하차에 부당하다는 의견이 유상무 등 동료 연예인과 네티즌들에 의해 꾸준히 제시되었고, 몇몇 프로그램에서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여자 아이돌들에게 어느 수준인지 명확하지도 않은 역사적 지식을 갖추길 강요하고

그러지 못한 이들에게 미래가 없다고 협박 중이다.



티파니와 장동민의 공통점은 그들이 연예인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장동민이 직업인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며 공적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방송에서 벌인 실수(‘실수라고 말할 수 있다면)와 티파니가 개인적인 계정에 전범기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벌인 실수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엄밀히 말해 사진에 붙은 스티커는 전범기를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였을 뿐, 전범기도 아니었다. 더불어 장동민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한부모 가정을 모욕했지만, 티파니가 모욕한 것이 무엇인지는 애매하다. 티파니와 장동민은 모두 KBS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지만 티파니가 장동민과 같거나 비슷한 무게의 물의를 빚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역사의식의 부재가 문제가 되어 사과하는 여자 아이돌의 모습은 익숙하다. 바로 몇 달 전에도 AOA의 지민과 설현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뭇매를 맞았다. 결국 두 사람의 눈물이 기사화되고 나서야 비난여론은 사그라들었다. 13년도 가장 뜨거운 걸그룹 중 하나였던 시크릿의 전효성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의 발언이 일베 유저일 것이란 의혹을 일으킨 후, 급격히 주가가 추락하기도 했다. 이 역시, 일베 유저임을 계속해서 의심받고 있는 랩퍼 블랙넛이 방송과 음원 순위에서 승승장구하는 일과 비교된다. 한국 사회는 여자 아이돌들에게 어느 수준인지 명확하지도 않은 역사적 지식을 갖추길 강요하고, 그러지 못한 이들에게 미래가 없다고 협박 중이다.

 


보호를 외치는 소수자들에게 엄격한 도덕적윤리적 잣대를 대는 것은 강자가 가진 권리 중 하나이다.

 


메갈리아가 생긴 이후 여러 노선으로 갈라진 한국 페미니즘 운동들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게 말하라거나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한다. 특히 메갈리아가 사용하는 워딩이 여성혐오에 기반한 미러링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성혐오적 언어를 양산한다며 비윤리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별로 특별하지 않은 광경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시위를 하거나, 대학생들이 반값 등록금을 외치며 거리로 나설 때에도 왜 보다 점잖고 품위 있는 태도로 나오지 않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보호를 외치는 소수자들에게 엄격한 도덕적윤리적 잣대를 대는 것은 강자가 가진 권리 중 하나이다. 티파니와 장동민이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무게가 다른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같은 처분을 받은 것은 티파니가 여자 아이돌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기관장이 워크샵에서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부르는, 치명적인 역사의식 부재를 노출하는 일은 징계도 아닌 경고에 머물렀다. 그러나 여자 아이돌의 경우 그를 비난하는 일이 일종의 스포츠가 된다.


 


쇼케이스 중 고개 숙인 지민

(사진 출처 : 스포츠 조선)



사람들은 고개 숙인 여자 아이돌의 모습을 좋아한다.


 

티파니의 게시글이 문제가 됐을 때, 어떤 사람들은 티파니의 SNS에 올라온 명품백 사진을 가리키며 명품백이나 자랑하는 골빈 여자로 만들었다. 티파니에게 모욕당한 가상의 누군가를 만들어 낸 의도가 분명한 비난이었다. 그들은 결국 티파니의 자필 사과문을 성의가 없다는이유로 두 번이나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사람들은 고개 숙인 여자 아이돌의 모습을 좋아한다. 어리고 예쁘지만 내 것이 아닌, 나보다 돈을 많이 버는 여자가 내 앞에서 고개 숙이고 울며 사과하길 바란다. 자신의 여성혐오를 역사의식이라는 명분에 기대 표출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초라한 남근을 추켜세우는 데 다수가 동조하고, 공영방송사가 협력했단 사실은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여자 아이돌과 미소지니스트, 모두의 어두운 미래에 광복은 언제 올까.  

 

 



필자 광개토.

광개토대왕님 만큼이나 넓은 (덕질영역을 자랑하는 이 시대의 페미니스트 덕후

최근의 즐거움은 세일러문 크리스탈과 오마이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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