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여, 페미행 급행열차를 타라!

 

최존

 

  ‘전명남(전직명예남성)’시절, 우습게도 스스로를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곤 했다. 순전히 페미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탓이다. 그 시절 나에게 페미니즘은 올바른 페미니즘올바르지 못한 페미니즘으로 나뉘었는데, 내 인식 속에서 한국형 페미니즘은 후자의 범주에 들었다. ‘올바른 페미니즘올바르지 못한 페미니즘’, ‘한국형 페미니즘이라지금 생각하면 코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그 때는 그랬다. 어린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거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었다. 선생들은 여자들은 권리를 외치기 전에 의무부터 수행해야 한다.’라거나 서양의 페미니즘은 여자도 더치페이를 하고 군대에 보내달라고 아우성인 평등사상인데 한국에 와서 변질되었다.’는 류의 헛소리들만 해댔다. 가장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은 여성혐오가 만연한 상태인데다 마치 사실인 마냥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악질적인 루머가 곳곳에 퍼져 있었다. 핑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을지는 누구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내게 페미니스트, 그 중에서도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불리할 때만 자신의 약함을 얘기하는 비겁한 사람들이었다.

 

  그랬다. 나는 꽤나 골 때리는 전명남이었다.

 

  “, 양성평등하려면 여자도 군대 가고 데이트 비용은 반반 딱 나눠서 내야 하는 거 아냐? 너희 왜 남자한테 의존하려고 해. 떳떳하게 살아!” 이렇게 말하고 다녔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평등이라는 글자에만 집착하여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여자와 남자는 같은 사람임을 말하면서 왜 굳이 여자를 사회적 약자에 포함시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자신이 약자 그룹에 속하지 않기를 바랐다. 때문에 도와주겠다는 남자의 말을 까칠하게 거절한 채,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힘에 부치는 짐도 내가 들었다. 썸타고 있던 남자애에게 무개념녀로 인식되기 싫어서, 헤어지고 나서 그 무리에게 , 그 김치녀?”라고 회자되기 싫어서 항상 자기검열을 했다. 내 숨통을 옥죄는 코르셋의 줄을 내가 당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게 잘못된 줄 몰랐다.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나.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정에서 태어나,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가장 보수적이라고 칭해지는 중동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거주했을 당시, 아버지는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항상 옷차림이 같았지만 어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전신을 가리는 아바야를 착용해야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와 같이 운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면허가 있음에도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머니는 점차 무력해져갔고,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 무력감과 우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보다 여권이 지극히 낮은 국가이고, 그 때의 체험은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진 예외의 것이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한국사회 역시 뿌리는 다르지 않았다. 가장이라는 말의 힘인지는 몰라도 아버지를 대하는 건 항상 어머니를 대할 때보다 어려웠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노고만큼이나 가정을 운영하는 어머니의 노고 역시 대단한데도, 아버지의 권위는 제일이었으며 아버지의 말은 어머니의 말보다 항상 앞섰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을 뿐더러 보통 다들 그렇게 사니 으레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남성은 군대도 가고, 데이트할 때나 결혼할 때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고들 하고, 보통 요즘과 같이 맞벌이 부부가 많지 않았을 때의 인식이다결혼 후에는 가정의 생계를 전담하여 책임지니까 부당하더라도 그들이 의무를 더 많이 지는 만큼 권리도 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군역의 의무를 지고, 똑같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부장제의 병폐를 알면서도 그 화살을 사회가 아닌, 나를 포함한 여성에게 돌렸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것은 항상 어딘가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던 중 우연히 메르스갤러리 저장소페이지의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호기심이 생겨 페이지의 게시물들을 쭉 정독했다. 유레카는 이럴 때 외치는 말일까? 그동안 불편했던 감정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는데, 굳이 나 스스로를 개념녀프레임에 맞추느라 버거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여자인 내가 아니라 여자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사회를 손가락질해야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런 해방감은 흔치 않았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작년부터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면서 요새는 메갈리아미러링에 대해 여혐VS남혐따위의 겉핥기식이 아닌, 비교적 심도 있는 기사들도 늘고 있다. ‘미러링이 의도된 전략이든 그동안의 미소지니에 참아왔던 여성들이 우발적으로 터뜨린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든 이제는 중요치 않다. 우아한 언어로 조리 있게 페미니즘을 말하던 여성들에게 콧방귀 뀌던 남성들이 너의 자지는 작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페미니즘이 이렇게 이슈 차트를 역주행하고 있지 않은가.

  메갈리아를 기점으로 페미니즘에 입문하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나와 같은 짜릿한 순간이 적어도 한 번씩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러링의 의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갓스시녀들이 ‘#남녀가뒤바뀐일본사회(#男女逆転した日本社会)’ 해시태그에 열광하며 그동안 여성으로서 겪었던 부당함과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건, 미러링이 악질적인 김치녀, ‘페미나치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제 막 페미니즘을 배우고 있는 중이고, 태어났을 때부터 노출되어왔던 탓에 나 역시 미소지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페미니즘을 지향하고부터 더욱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옥죄고 틀에 맞추기 위해 힘들이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요새 가장 따끈따끈한 내 인간관계인 연애에서도 볼 수 있다. 내게 있어서 연애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랑하는 연인과 편하고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자랑 좀 하자면, 운 좋게도 애인 역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인지라 페미니즘의 정서를 함께 공유한다. 내 인생에 있어 요즘과 같이 자존감이 높고 동시에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던가!

  혹자는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 내지는 여성우월주의 아니냐고 한다. 확실히 페미니즘의 시작은 억압받는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페미니즘 이름 아래 수많은 목소리들이 있지만, 이러한 부조리의 근본적인 원인이 가부장제인 것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이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하에 이뤄지는 모든 성차별과 고통에 반대한다. 당신이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즘에 적대적일 이유가 없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페미니즘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홍달님의 사연을 바탕으로 구성됐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홍달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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