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에게 자유를!>

암탉


마돈나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일부 미디어에서는 이 사진을 두고 기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까지 여자는 겨드랑이 털이 나지 않는 줄 알았다. 나도 겨드랑이 털이 나지 않았을 때였고, 이전까지 겨드랑이 털이 난 여자를 본 적 없었다. 당신은 언제 처음 여자의 겨드랑이 털을 보았는가? 난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처음이었다. 여름날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반팔을 입고 팔을 드는 순간, 담임 선생님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멈칫했다. 처음엔 저게 뭐지?’하다가 겨드랑이 털임을 눈치 채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너도 봤냐며 제각각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다음날 선생님은 겉옷을 걸치고 오셨다.

 

    왜일까? 왜 아이들은 선생님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수군대었고, 왜 선생님은 조용히 겉옷을 입고 오신 걸까? 나는 왜 선생님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에 휩싸였고, 여자도 겨드랑이 털이 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됐던 것일까? 난 왜 이전까지 여자의 겨드랑이 털을 접해볼 수 없었을까? 여자도 털이 나는 건 확실한데 왜 여자의 체모만 부끄러움과 금기,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우리들은 왜 제모할까?

    친구들에게 첫 제모가 언제였냐고 물어보니 대부분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를 꼽더라. 나도 같다. 살결이 드러나는 스타킹을 신고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어야 하는데, 털이 난 내 종아리가 부끄러워서 엄마에게 제모 용품을 사달라고 졸랐다. (제모 지옥의 시작이었다.) 서투른 솜씨에 피도 많이 났고 물이 닿으면 무척 쓰라렸다. 그래도 털이 보이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기에 만족스러웠다.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갈수록 나는 점점 더 다양한 영역의 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쯤부터는 막 난 여린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기 시작했고, TV에 나오는 제모 크림이 좋아보여서 제모 크림으로 다리털을 제모하기도 했다. 눈썹도 뽑아 정리하고 가끔은 눈썹 칼로 인중 털을 밀었다. 솜털 때문에 화장이 뜨는 것 같아 스트립 왁스로 볼에 난 솜털을 제모해본 적도 있다.

 

    제모를 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면도칼, 제모 크림 등으로 피부 위의 털만 걷어 내는 방식의 제모는 금방 털이 다시 올라오고 아차하면 다치기도 쉽다. 왁싱, 족집게로 모근까지 털을 뽑아내면 털은 느리게 자라지만 무척 아프다. 물론 이 방법도 오래가는 건 아니다. 레이저 반영구 제모 시술도 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고 이 방법 또한 아프다. 사람 따라 털이 금방 다시 자라버리기도 한다. 제모의 왕도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왕도를 찾아야 한다. 찾지 못했더라도 찾은 체 하라고 강요받는다. 그 비용과 고통은 고스란히 여성의 몫이 된다.

 

    얼마 전 약속 시간에 늦어 급하게 옷을 입는데, 따뜻해진 날씨에 맞게 짧은 옷을 입었다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말았다. 까먹고 제모하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긴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급하게 역으로 뛰어가다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 억울했다. , 털 만큼 죄책감 없이 혐오할 수 있는 신체 부위가 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부터 여자의 체모는 금기시되었을까?

    여성의 체모가 금기시된 역사, 즉 제모의 역사를 훑어보려면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의 기준 즉 이 털 한 올 없는 매끈한 피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노예나 이방인을 제외한 모두가 제모를 했다고 한다. 이집트뿐만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에서도 바닷조개를 족집게처럼 사용해 털을 뽑아내거나 불에 그슬려 태워버리는 방식의 제모가 유행했다. 기원전 500년 경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비디우스의 저서 사랑의 기교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연출하기 위해 종아리 털을 깎는 것은 필수 사항이라고 언급했다. 임산부의 조오신하지 못한 처신이 신의 노여움을 사 체모가 많은 여자아이를 낳게 한다고 믿고, 체모가 많은 여자아이를 학살하거나 구경거리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그리스, 로마의 제모 문화는 이슬람 사회로 건너갔다. 가부장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성인의 생리적 기능을 가졌더라도 권리를 행사하는 문제에 있어선 아동 취급을 받았다. 이슬람 사회는 여성의 성숙한 몸을 그 법적 지위에 걸맞게 끌어내릴 수 있는 상징적 절차로써 제모를 활용했다. 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털난 성기를 제모하게 해, 어린 아이의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1915년 질레트사의 여성용 면도기 광고. 

소매가 없는 여름 드레스를 위해 질레트사의 면도기로 '무례한 털'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건 100여년밖에 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여성 해방 운동이 급물살을 타면서 여성들은 불편하게 질질 끌리는 옷을 벗어던지고 짧은 치마와 짧은 소매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옷이 몸 전체를 감싸는 스타일이 유행했기 때문에 체모가 노출되지 않았고, 옷을 벗는 실내에서는 체모가 보여도 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여성들이 여성스러움을 잃을까 걱정했던 여성지 칼럼니스트들은 겨드랑이와 팔뚝의 털을 면도할 것을 권했고, 미국의 화장품 회사들은 여성의 체모가 해로운 박테리아의 온상이라고 낙인찍으며 탈모제를 내놓았다. 1915, 세계적인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가 최초의 여성 (겨드랑이용) 면도기를 발명하면서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는 광고 문구로 여성들의 털 혐오감을 부추긴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질레트의 혐오 조장 광고는 역겹게도 대성공을 이루어 1916년에만 782,028개의 면도기가 판매되었고 1917년에는 백만 개 이상의 면도기가 판매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전에는 어떤 미국 여성도 다리를 면도하지 않았지만, 1964년경에 이르자 44세 이하 여성의 98%가 다리털을 밀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완벽한 승리였다.

 

미디어에서 말하는 여성의 체모

    책 여자다운 게 어딨어의 저자 에머 오툴은 2012년 한 지상파 방송에서 18개월간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를 노출해 폭발적인 관심을 얻고 전국적인 스타로 거듭났다고 한다. (그 털 진짜냐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한다.) , 영화 <색계>를 검색하면 색계 줄거리, 색계 주인공 같은 그럴듯한 검색어들을 제치고 탕웨이 겨털이 연관 검색어 가장 상단에 올라 있다. 모두 여성의 몸에서 체모가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여성의 체모가 보이는 순간, 체모의 존재를 처음 안 것처럼 뻔뻔하게 굴곤 한다. 도대체 여성의 체모가 뭐라고 생각하기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까? 미디어에서 여성의 체모를 다루는 방식에 유념해야 한다.

 

    미디어에서 여성의 체모를 찾아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미디어에서 여성의 체모를 다룬다고 하면 대부분 개그 프로그램에서, 엽기적이고 비하적인 뉘앙스로 다뤄진다. 이는 유머로 소비되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의 체모를 지우고, 여성 신체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준다. 또한 이는 꼼꼼하게 제모된 여성 신체에 대한 숭배와 병행되어 여성에게 (제모 열심히 하라는) 경고 내지는 공포감을 심어준다.

 

    개그 프로그램 외에도 여성의 체모가 언급되는 미디어가 있다. 뷰티 프로그램이다. 뷰티 프로그램도 여성의 체모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개그 프로그램과 별 다를 바 없다. 개그 프로그램의 모멸적인 언어들을 정제해 돌려 말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무해한 척 여성들에게 다가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유해하다. 이러한 언어의 정제전략은 이전에도 널리 쓰인 적 있다. 한창 여성 제모 대중화를 주도하던 1920년대 질레트사는 민소매 댄스 드레스를 위한 에티켓’, ‘박테리아따위의 핑계를 대며 여성들에게 자기 신체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었다. 뷰티 프로그램이 곧장 뷰티 산업과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여성들에게 제모가 에티켓이라고 말하는 뷰티 프로그램의 배후에 뷰티 산업이 버티고 있다. 과거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지 않은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고 광고했던 질레트사처럼 말이다.

 

    만약 이 외의 미디어에서 우연히 여성의 체모가 노출된다면 그것은 방송 사고가 된다. 특히 아이돌, 배우의 경우 타격은 배가 된다. 여성의 체모는 우스꽝스럽고 비천한 것으로 여겨져 아이돌, 배우에게 요구되는 모든 이미지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털은 그냥 신체 일부일 뿐이다. 여성의 체모가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양 다루는 꼴을 보라. 명백히 여성의 신체를 향한 유해한 검열이다. 이는 여성의 체모를 죄악시하는 문화를 더욱 견고히 한다.

 

우리들은 제모해야 할까?

 

영화 러브 픽션 中

 

    영화 <러브 픽션> 중 희진(공효진 역)이 애인 주월(하정우 역) 앞에서 당당하게 겨드랑이 털을 내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희진은 당황하는 주월에게 이게 (겨드랑이 털이) 뭐가 어떻냐고당당하게 되묻고, 주월은 그런 희진에게 더욱 마음을 빼앗긴다는 내용이다. 이 장면에는 다소 슬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다. 공효진은 <러브 픽션> 언론시사회에서 영화 속 겨드랑이 털은 사실 가짜였다고 밝혔다. 원래 감독의 요구는 공효진의 진짜 겨드랑이 털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공효진도 이에 동의했지만, 촬영 일정이 다가오자 부담감이 들어 거절했다고 한다. 만약 공효진이 아닌 하정우가 겨드랑이 털을 내보이는 내용이었다면 그는 공효진과 같은 고민을 했을까? 아니, 애초에 남성의 겨드랑이 털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서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고민해볼 거리가 하나 생긴다. 우리는 앞에서 여성의 체모를 죄악시하고 제모를 강요하는 문화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것임을 합의하고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모하면 안 되는 걸까? 결국 제모하기로 결정내린 공효진을 비난해야 할까?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제모에 대한 고민도 커진다. 제모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구속인 건 알겠는데, 제모하지 않은 여성을 흉보는 이들 앞에 제모하지 않은 내 살갗을 내놓긴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본질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자. 우리는 여성을 구속하는 미의 신화, 그리고 그것의 다양한 발현을 지적하려는 것이지 그것을 수행하는 여성을 질타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털이 난 상태 혹은 제모한 상태를 자유롭게오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현 상황은 타인의 개입 없이 온전히 내 의지에 따라 제모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인가?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지 않은 여성이 지하철에 타 손잡이를 잡는 상상을 해보라. 칸 안의 사람들이 그의 겨드랑이를 힐끔거리고 불경하게여길 것은 뻔하다. (제모하지 않은 여성을 향한) 조롱과 (조롱을 피하기 위한) 검열이라는 두 선택지만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자랐다. 부끄러움을 내재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부끄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가 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자율성이 결여된 선택을 한 이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정말 고민해봐야 할 것은 왜 제모라는 선택지가 등장했고 강요되는가, 나는 왜 털이 난 그대로의 상태 혹은, 제모한 상태를 편하게 여기는가 하는 점이다. 미의 신화 담론의 의의는 제모를 해라, 말아라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미의 신화를 인지하고 미의 신화가 의도한 바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제모하든 말든, 염색하든, 파마하든 모두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은 없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봊대로 행동하자.

 

참고 문헌

: 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 다니엘라 마이어, 작가정신

아름다움의 발명, 테레사 리오단, 마고북스

여자다운 게 어딨어: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에머 오툴, 창비 


필자 소개

여태껏 내 손으로 덕질한 것 중에 페미니즘만큼 재밌는 게 있었나? 페미니즘에 강하게 치인 새내기 페미입니다.

<? 마른 거 그거 완전 좋은 거 아니냐?>

암탉

 

    한국만큼 외모지상주의가 극에 달한 나라를 찾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지하철 플랫폼엔 성형외과 광고가 벽지처럼 도배되어 있고 화장은 예절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또한, 그 잣대는 유독 여성들만을 향해 날을 벼리고 있다. 여성의 신체를 부위별로 나누어 평가하고 여성들로 하여금 파편화된 여성상에 다가가도록 한다. 미의 기준에서 벗어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징벌은 가혹하다. (온갖 매체에서 미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연예인들이 외모로 인해 굴욕을 겪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 상황은 분명히 유도된 것이다) 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몸을 지배하는 여성혐오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 외모 꾸미기가 하나의 생존 전략이 된 셈이다.

 

    ‘몸을 지배하는 여성혐오의 대표적인 예시로 지난 회차에서 이야기했던 살찜 혐오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몸을 지배하는 여성혐오를 짚으며 마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다이어트의 성정치를 절반만 알고 넘어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번 회차에서는 마름 혐오’(Skinny Shaming)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 마른 거 그거 완전 좋은 거 아니냐?’, ‘마른 걸 누가 혐오해?’라고 생각했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마른여자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법

 

    난 168cm 45kg의 여자이다. 원래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라 딱히 운동하지 않아도 항상 이와 비슷한 몸무게를 유지한다.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살찔 걱정 없어서 좋겠다며 축복받은 체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의 삶은 몸무게에 대한 압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쭉 강박증을 가지고 살아왔다. 중고등학생 시절, 폐쇄적인 또래 집단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에게 외모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내 몸이 평균보다 말랐기 때문에 항상 나는 마른 애로 분류되었고, 때때로 내 이름이 아닌 몇 반 마른 애로 불리곤 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하나하나 나의 마른 몸과 연관 지어 그러니까 살이 안 찌는 거야’, ‘병원에 가봐’, ‘한약을 먹어봐등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일부 몰지각한 아이들은 걱정해준답시고 밥을 입에 쑤셔 넣기도 했다. 폭언을 일삼는 이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해골 같다’, ‘왜 이렇게 삐쩍 말라 비틀어졌냐’, ‘환자 같다는 식의, 듣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말들을 툭툭 내뱉던 아이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너는 내 옆에 서지 말라며 밀어내 무안할 때가 있다. 나를 두고 자신의 몸매와 비교하면서 우울해 하는 친구들도 많다. 내가 딱히 노력해서 마른 것도 아니고 유전적으로 살이 안 붙는 체질일 뿐인데 나에게 체형 유지 방법이나 식습관에 관해 물어보니 해줄 말이 없다. 원래 살이 안 붙는 체질이라고 대답했을 때 혼자만 알려고 하냐’, ‘치사하다는 반응이 돌아오면 난감하다. 이렇게 부러움 당하는상황에서 나는 굉장히 애매한 위치가 되어 버린다. 정작 나는 다이어트를 해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마른 몸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는데, 친구들이 나에게 너는 다이어트 안 해도 되니까 좋겠다는 말을 할 때면 내 몸에 대한 발언권을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Body Shaming(타인의 몸매를 비웃거나 비난하면서 수치심을 주는 행위[각주:1], 이하 바디 셰이밍)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여전히 나에게 너무 말랐다’, ‘살 좀 쪄라’, ‘밥 좀 먹어’, ‘혹시 다이어트하세요?’ 따위의 말로 운을 띄우는 이들이 있다. 23년째 듣다 보니 이제는 인사치레구나 할 정도로 익숙해졌을 뿐이다. 10대 때의 바디 셰이밍과 차이점이 있다면 성인이 된 후의 바디 셰이밍에는 남성에게 대상화되는 시선이 더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마르면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부터 너무 마르면 가슴이 작다는 성희롱 발언까지, 사회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난 내 몸이 말랐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관심 두고 싶지도 않고 별로 자각하고 살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네가 지금 어떠어떠한 몸 상태입니다.’, ‘너의 몸매가 어떻습니다.’하고 각인시켜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당당하게 말이다. 그들은 내 몸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없고 난 그들에게 내가 마른 이유에 관해 설명할 의무가 없다.

 

마름 혐오도 바디 셰이밍이야?

 

    바디 셰이밍 하면 보통 살찐 몸매를 향한 것을 떠올리게 된다. 마른 몸매를 향한 바디 셰이밍은 그와 약간 다르다. 마른 몸매를 향한 바디 셰이밍은 살찐 몸매를 향한 바디 셰이밍보다 더 당당하다. 보통 살찐 몸매를 가진 사람에게는 왜 이렇게 뚱뚱하냐’, ‘살 좀 빼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데 마른 몸매를 가진 사람에게는 너 왜 이렇게 말랐냐’, ‘살 좀 쪄라하는 식의 직접적인 지적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전자와 후자 모두 상대방의 몸매를 평가하는 행위이고 무례한 지적인 건 마찬가지인데, 후자의 경우 실례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아가서 본인이 하는 이야기가 칭찬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마름 혐오가 상대적으로 덜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마른 몸매를 가진 사람들은 자랑질이라는 오명 아래 바디 셰이밍을 바디 셰이밍이라고 말할 발언권조차 박탈당한다. 전시할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에 마름 혐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말라서 더 쉽다.

 

뚱뚱하면 뚱뚱하다고 지X, 마르면 말랐다고 X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란 없다. 미의 기준은 매우 모호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획일화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신체를 못생겼다고 평가한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과 상관없이 획일화된 기준에 다가가기 위해 약품, 수술 등 인공적인 방법이 동원된다. 외모 꾸미기 비용은 마치 세금처럼 여성들에게 부과된다. 병든 사회가 개인에게 외모지상주의라는 강박증을 뒤집어씌우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살과 뼈를 깎게 한다.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틀을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대상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이 개개인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여성의 신체를 부위별로 조각내고 상품화하여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환상의 틀을 만들고, 경쟁적으로 이 이미지에 부위별로 가까워지길 강요한다. 이런 사회에서 설리는 예쁘지만, 키가 너무 큰 여자고, 설현은 예쁘지만, 너무 까무잡잡한 여자다. 여성의 외모는 항상 흠결사항으로 읽혀, 그 여성이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의 외모가 항상 장점 혹은 매력으로 읽히는 것과 대조된다.)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준하는 여성이 존재할까? 나는 없다고 확신한다. 아름다움, 나아가 미의 신화 자체가 여성을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존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모든 사회가 여성에게 어떤 이상적 아름다움을 고취시켜 왔지만, 그 목적이 다수를 배제하는 것에 있으므로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다수가 그 이상에 다가서면 이상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또한, 나오미 울프는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에서 여성이 법적·물질적 장애를 돌파할수록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는 더 엄격하고 무겁고 무자비하게 여성을 짓누른다고 말했다. 무너져가는 남성중심사회를 유지하고자 아름다움이 정치적 도구로써 이용됐다는 것이다. 파도처럼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에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는 여성은 계급화하기 쉬운, 다루기 쉬운 여자가 된다.

 

    ‘살찜 혐오이든, ‘마름 혐오이든 그 근본에는 여성혐오가 자리 잡고 있다. 마른 몸매를 선호하는 사회에 사는 내가 마름 혐오를 겪게 되는 이유는 내가 마름이라는 방식으로 아름다운 여성의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살찜이라는 방식이든 마름이라는 방식이든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교정의 대상, 곧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어떤 길로 탈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무 뚱뚱한 사람 혹은 너무 마른 사람만 남는다.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다가가라며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것, 그것이 미의 신화가 의도한 바이다.

 

페미니즘이 나에게 준 해답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 잡은 동아줄 같은 존재이다. 살기 위해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회가 살기 편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접해도 나처럼 절박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회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발 벗고 나서서 사회 구조를 분석할 수밖에 없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페미니즘은 타자화된 내 몸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힘이다. 페미니즘을 통해 나의 몸과 삶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방향성을 찾았다. 마른 내 몸이 기형적인 게 아니라 사회가 기형적인 것이다. Shame을 주는 Shameless들을 족치자.

 

이 글은 Sarah 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Sarah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필자 소개

여태껏 내 손으로 덕질한 것 중에 페미니즘만큼 재밌는 게 있었나? 페미니즘에 강하게 치인 새내기 페미입니다.

 


  1. 출처: Oxforddictionaries.com [본문으로]

내 삶을 짓누르는 살

암탉

 

    내가 요즈음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스트레스받는 것은 자소서도, 면접도 아닌 외모 꾸미기이다. 사회에서 말하는 취준생의 틀에 내 모습을 맞추면서 개성이 지워지는 것 같아 씁쓸했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기준에 내 모습을 맞추는 것이 처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릴 적 다 컸네! 미스코리아 나가도 되겠다.’는 동네 어른들의 인사말부터 넌 여자애가 맨날 후드티만 입고 다니냐? 좀 꾸미고 다녀라는 남자 선배의 말까지, 의식하지 못했을 뿐 내 몸을 둘러싼 사회적 담화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외모 이야기가 지겨워졌다. 거울을 통해 바라본 내 몸이 정말 몸인지 의문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몸을 되찾고, 내 주위를 맴도는 진정한 여성의 몸이라는 망령을 떨쳐내고 싶다. 그래서 떠들기로 했다. ‘진정한 여성의 몸이 아닌 내가, ‘여성의 몸에 대해. 5호부터 함께할 새 코너 <내 몸 탈환기>에서는 여성의 몸, 즉 외모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에 대해 20대 여자 대학생의 시선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대학교 가려면 살 빼야 돼!”

 

    고3이 되고 본격적인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공부만 하다 보니 살이 찌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눈에 띄게 통통해진 내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참기 힘들다는 듯 (그들의 말에 따르면)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여자애가 왜 이렇게 살이 쪘니! 그래도 고3이니까 괜찮아 대학 가서 살 빼면 되지~”

 

    나는 졸지에 고3이라는 신분을 빌어 내 몸의 살찜을 허락받은 꼴이 됐다. 내 몸의 상태조차 누군가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사회, 그곳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였다. 그들은 어떠한 기준을 정해 놓고 날 그 기준에서 벗어난 반항아 취급했다. 3이라는 신분을 빌어 살찜이라는 일탈을 허락해줄 테니, 언젠가는 끝내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갑자기 찐 살을 두고 마치 시한폭탄이라도 떠안게 된 것처럼 빨리 떨쳐내라고 구는 것이 싫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고3이라는 살찜 면죄부를 박탈당하면서 합격 축하한다는 말보다 대학교에 가려면 살 빼야 한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합격 발표가 나고도 다이어트하지 않는 나에게 엄마는 답답하다. (네 몸) 더는 못 봐주겠다.”고 했다. 마치 내가 마름을 빚지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엄마 때문에 심란했다. 내 몸은 봐주지 못할 잘못된 몸인가?

 

빼앗긴 몸에도 봄은 오는가

 

    대학교 1학년 때 들어간 동아리는 Body shaming의 장이었다. 엄마의 닦달에 못 이겨 어느 정도 체중 감량을 하긴 했지만, 동아리 친구들 사이에 서보면 내 다리는 꽤 통통한 편이었다. 이런 내 다리를 두고 왜 치마를 입냐?’, ‘상체만 보면 괜찮은데 하체를 보면···.’ 하는 식의 발언들이 오고 갔다. 초면에 묻지도 않은 다이어트 방법을 알려주는 이도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당신은 내 몸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고 쏘아붙였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면 동아리의 분위기를 망치게 될까 무서웠다.


    여성의 몸은 주인 없는 땅처럼 많은 이들로부터 침범당한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기에 간섭당해도 되는 몸이다. 특히 여성 비만인은 마름의 기준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에서 모두 벗어난 완전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몸은 사회적으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여 체제를 어지럽힌다. 이렇게 비체화된 몸은 손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회는 기준에서 벗어난 여성들의 몸을 이질적이라고 판단하여 기준 안에 짜 맞추기 위해 지적을 아끼지 않는다. 나아가서는 충격요법이랍시고 비난을 일삼기도 한다. 여성들의 몸은 사회적으로 빼앗겼다. 말 그대로 전쟁터와 다름없다.

 

* 비체(abject)란 대상(object)~이 아닌을 뜻하는 접두사 ‘a-’를 붙여 만든 단어로 주체(subject)도 객체(object)도 아닌, 경계를 넘나들며 정체성, 질서, 체계를 어지럽히는 것들을 말한다.[각주:1]

 

비혐(비만 혐오) 사회에서 살아남기

 

    광고 수업 시간이었다. 교재 한 귀퉁이에 실린 조그만 예시가 눈에 띄었다. ‘내 몸매 완전 착해라는 카피의 핸드폰 광고였다. 이미 관용어로 자리 잡은 착한 몸매라는 말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몸의 생김새를 옳고 그름, 착하고 나쁨으로 나눌 수 있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몸무게는 이미 윤리의 범위 안에 속해 있다.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먹으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야식 섭취는 양심 없는행동이다. ‘회개리카노라는 단어를 아는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의 회개와 아메리카노의 합성어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그동안 섭취했던 칼로리가 0으로 초기화된다는 농담에서 파생된 신조어이다. 고칼로리의 음식을 먹고 지방분해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회개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살찜을 죄악시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살찜에 대한 비판적 정당성을 제공하고 나아가 외모지상주의를 더욱 공고히 한다. 살찜은 죄악이고 양심 없는짓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연장선에 비만 여성을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풍토가 있다. TV를 켜면 내 또래의 비만 여성을 찾아볼 수 없다.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나 식습관을 희화하여 개그 코드로 소모하는 코미디언뿐이다. 그들이 비만 여성이기 때문에 소외되고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게 소름 끼친다. 장군 어깨, 드럼통 허리, 무다리 등등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해 비하하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쓰이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비난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당연한 나라이다. ‘뚱뚱한 여자그 자체이므로 그들을 혐오하고 괴롭히는 데에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한 사람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비만 여성을 괴롭히고 비하하며 시청자들의 웃음을 이끌어 내는 풍조는 현실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비만 혐오도 우아하게 할 수 있다. ‘자기관리라는 마법의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관리의 미명 아래 누구나 우아하게 비만인을 혐오할 수 있다. 자격지심 따위의 말을 붙여 상대방을 간단하게 프로 예민러취급하거나, ‘널 생각해서 말해주는 건데~’로 운을 띄움으로써 상대방의 입을 원천 봉쇄해버리면 된다. 여기서 널 생각해서 말해주는 건데~’내가 지금부터 너의 몸을 평가하고 참견할 건데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포장해놓았으니 내가 네 몸을 비난해도 욕하지 마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기관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기준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또한 자기관리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그 잣대를 들이댈 권리도 없다. 사실 타인의 몸매를 지적하는 이들이 정말 자기관리 때문에 타인의 몸매를 지적하는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여성이 열등해서 2등 시민이 됐다는 것처럼 자신의 근본 없는 비하 발언에 타당성을 부여해 줄 가장 적합한 말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재생산될 뿐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와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여성을 착취하고 미의 신화라는 감옥 안에 가두어버린다.


    살은 그냥 살이고 몸은 그냥 몸이다. 어떠한 죄악이나 잘못도 아니고 옳고 그름의 개념도 없으며 그 사람의 행복함이나 게으름을 보여주는 정확한 지표가 되지 못한다. 설사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외모를 평가하고 비하하는 행동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 줄 수 없다.

 

    남들의 기준에 내가 나쁜몸매일지라도 난 착한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받을 수도 있다. 나에겐 모든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하는 몸매를 갖고 사회적 아름다움을 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 사회가 나의 몸을 잘못됐다고 결정하고 부끄러워하길 강요할지라도 난 내 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가치중립적인 내 몸에 부정적인 가치를 덮어씌우는 것은 사회이다.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가 사회에 되물어볼 차례이다



필자 소개 

여태껏 내 손으로 덕질한 것 중에 페미니즘만큼 재밌는 게 있었나? 페미니즘에 강하게 치인 새내기 페미입니다.

  1.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201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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