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나나

제1호 「벨라 B.의 환상」


(출처 : 아마존프랑스)

레몽 장(1925-2012)은 단편집 『벨라. B의 환상』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이자 교수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벨라. B의 환상』을 3호에 걸쳐서 살펴 볼 계획인데요. 오늘은 첫 번째 단편, 「벨라 B.의 환상」입니다.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던 즈음, 레몽 장은 엉뚱한 착상을 한다거나 신선한 자극을 안겨주는 작가로 평이 나있었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잠시 살펴볼까요? “우리 주변에서는 논리성을 저버린 일들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다만 우리들이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뿐이다.” 맞아요. 이 이야기는 “논리성”을 저버린 이야기에요. 그렇다고 그 “논리성”이라는 것이 논리적이라고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엉뚱하고 신선하다고도 하는데요, 글쎄요, 무엇이 엉뚱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지요? 지금 바로 살펴봅시다.




<벨라 B.의 환상>


벨라는 어떤 불안을 느끼고 있는 한 소녀입니다. 오랜 증세 때문인지 그녀는 가냘프고 생기없이 초췌하기만 한데요. 그녀를 진단해야 하는 ‘나’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합니다. 그러다 문득 벨라를 프로이트나 그로덱의 환자와 닮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의사이고, 그녀는 치료받아야 할 환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자문하는데요. 그러면 ‘나’는 프로이트인건가요?


벨라는 “과육과 같이 도톰”한 입술과 “얇은 실크 블라우스 아래로 풍만하고 지나치리만큼 커보이는 가슴”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에 따르면 말이에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이게 참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벨라의 인품에서는 조심성이나 신중함이 두드러지는데, 왜 자꾸 “상당히 묵직한 이 두 개의 젖가슴”을 감추려고는 하지 않는 거냐고요.


그녀는 “거미 공포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미라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벨라가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만 그녀 위로 기어오르는 것인데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침대 발치 벽에 뚫린 구멍으로부터 나온다는데, 심지어 그 구멍조차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벨라는 이를 잘 알고 거의 체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거미들이 그녀의 성기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를 벨라의 환상쯤으로 생각합니다. 주치의 페트렐 박사 또한 “성에 관계된 예민한 사안이 확실하다”며 정신과 상담을 받을 것을 조언하지요.


(출처 : 구글)


그리하여 벨라와 가족들은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네메츠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네메츠 교수 또한 벨라의 케이스를 어린 소녀들이 가질 수 있는 전형적인 거미 혐오감, 혹은 공포증이라고 진단하며, 그 원인은 “성과 관련된 사항들”에 있다고 합니다. 그는 벨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거미 이야기나 하는 이 어린 처녀가 이야기를 꾸며댈까 걱정스러웠답니다. 그래서 그녀의 가족들에게 어린 시절, 특히 벌레와 관련된 이야기가 없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벌레가 벨라를 괴롭혔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개미들이 벨라의 몸 위를 기어 다니면서 아랫배와 허벅지를 가로지르는 붉은 자국을 만들어낸 사건, 해변의 모래가 “절대로 안되는 곳”, “은밀한 장소”로 들어간다며 벨라가 불평하던 사건, 파리를 잡아 가두려고 유리컵을 사방에 탁탁 치던 벨라의 몸에 다음날 붉은 원 자국들이 생긴 사건(아마 파리가 벨라의 몸 위에 붙어댔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추측만 할 따름이지요.) 등. 물론 이번 거미 사건과 마찬가지로 벌레를 실제로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벨라 뿐이었습니다.


(출처 : 구글)


네메츠 교수는 가족들의 증언에서 확신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예측이 옳았던 것입니다. 더불어 그녀의 “야릇한 아름다움”, “묵직한 가슴”과 함께, “얌전하고 겸손하며 수줍”어하는 모습은 그로 하여금 어떠한 사명감까지 갖게 했다는데요. 심지어는 눈물이 북받칠 정도랍니다. 생전 가져본 적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나. 말하자면 ‘내가 그녀를 꼭 치료해 주겠다, 그녀의 치료를 나의 사명으로 삼겠다’라는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치료는 “정기적인 면담” 내지 “진정제” 처방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벨라의 증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벨라가 말하길, 그 거미들이 온 몸을 기어다닐 뿐만 아니라, 그녀를 물기라도 하는 것인지 온 몸에 붉은 자국이 넓게 퍼져나간다는 것인데요. 그 붉고 따가운 자국들은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는 가운데가 거뭇거뭇하게 변하기까지 합니다. 이를 두고 네메츠 교수는 “심신상관적인 징후의 새로운 발현”이라며, 이를 미리 예고했던 본인의 선견지명에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벨라의 증세는 악화되어가고 거뭇한 자국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갑자기 가정환경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곳에서 벨라를 끌어내어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선, 그녀의 옷차림새부터 바꾸어야할 것 같습니다. “이 얇은 천과 레이스류, 그녀가 줄곧 입고 다니는 이 펑퍼짐한 치마들, 간들간들하게 이마 위로 길게 늘어진 머리, 팔목에 무겁게 늘어진 팔찌들, 그녀가 자주 바꿔 다는 귀고리, 브래지어, 어쩌면 그녀가 착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코르셋”. 그녀를 “요즘의 젊은 처녀들”처럼 현대적인 여자로 바꾸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벨라는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는 이 치료법을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결국에는 점점 “다른 여자”로 변해갔습니다. 팽팽히 부풀어 한가운데가 거뭇거뭇한 자국들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말이지요. 이제는 청바지도 입게 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때 지난 헤어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벨라는 이상하게도 유독 긴장하게 됩니다. 미용 중에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어댄 탓에 결국 미용사 클라라의 면도칼에 살짝 베이게 되는데요. 하필이면 잔뜩 부어있던 피부가 베이게 됩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걸, 그 베인 상처에서부터 아주 작은 거미 세 마리가 튀어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다행인건 벨라가 이제는 회복했다고 합니다.



<누구의 환상일까?>


우리는 적어도 벨라의 케이스에선 프로이트주의적 진단이 패배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벨라의 환상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적 진단이야 말로 환상이었던 것이지요. 모두는 벨라의 증언이나 경험, 심지어 그 증거조차도 믿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신분석학을 믿을 뿐이었지요. 벨라의 목소리는 보기 좋게 묵살당하고, 그 고통에 있어서 타인일수밖에 없는 정신 분석학의 목소리에 의해서만 그녀의 병명이 진단되었습니다. 왜 세상은 벨라의 병이 신경증이라고 판단하였을까요? 왜 그녀의 일관된 증언을 믿지 않고, 그녀의 몸이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하고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에서 오로지 정신분석의의 예측이 옳다는 것만을 보았을까요?


이 세계가 벨라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것임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거미들은 벨라의 몸을 자신들의 소유지로 삼은 듯 밤마다 그 위를 기어 다닐 뿐 아니라, 알집, 즉 자궁으로써 그녀의 몸을 취했지요. 사실 벨라는 사춘기 이전부터 외부세계의 물질이 그녀를 파고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벨라가 그녀의 성기와 관련하여 불편함을 호소하는 것은, 그녀의 성이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에 불편함을 가진다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벨라의 질 속으로 파고드는 거미를 여성,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은밀히 침투해 지배하려 하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성 중심 세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녀의 몸이 거미들이 기어다닐 수 있는 소유지, 즉 남성 세계의 소유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자궁의 기능, 즉 여성의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벨라를 좀먹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벨라 만이 벌레를 포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성립된 세계의 질서 속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적 지배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요즘 한국에서도 여성의 몸,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배나 억압이 어디 있는지 전혀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프로 불편러’라는 말도 자주 사용되고요. 어쨌든 벨라의 신체를 넘어서 정신까지 이 세상에 적응시키고자 했던 것이 바로 정신분석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신분석학은 그녀의 경험을 일종의 판타지, 신경증, “성에 관계된 예민한 사안”으로 진단하여 궁극적으로 그녀를 거미를 볼 수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현실에 눈멀게 하고자 하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것처럼, 벌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출처 : 구글)


거미는 벨라의 몸을 소유합니다. 바로 옆에서 정신분석학은 그녀의 목소리를 빼앗아버리고 병을 진단합니다. 프로이트주의는 임의로 그녀를 진단하였지요. 거미를 목격한다는 것, 즉 그녀의 몸에 대한 거미의 침투를 포착한다는 것만으로 그녀를 신경증 환자로 진단내렸습니다. 거미들은 적극적으로 벨라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했고, 정신분석의는 벨라가 이 지배에 대해 적응하거나 또는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도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벨라의 “환상”으로부터 그녀를 자유롭게 해준 것은 정신분석학이 아니었지요. 한 미용사의 실수, 면도 컷이 벨라를 정신분석학적 진단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난 세계로의 해방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는 신경증의 원인은 사실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자, 확실히 이 이야기는 “논리성”을 저버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거미? 정신분석의? 아니면 둘 다? 설마 거미가 기어들어갈 수 있는 여성기를 벨라가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 않겠지요?



<프로이트에 대한 말말말>


(출처 : 구글)


“신프로이트주의적 수정주의를 가장 잘 특징짓는 용어는 아마 ‘적응’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의 적응인가? 기초가 되는 가정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흑인, 또는 특별히 불운한 계층의 일원이면 어떠한가? 그들은 이중적으로 불운하다. 그들은 우리가 보아온 대로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어렵고 불안정한 정상성을 획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그들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는 특수한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기정의 또는 자기결정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르쿠제의 관점에 있어서, 치료의 과정은 ‘체념의 과정’일 뿐이고, 건강과 신경증 간의 차이는 ‘체념의 정도와 효과’일 뿐이다.”

“프로이트는 여성해방론이 치유하려고 하는 것을 진단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정신분석은 가부장제 사회를 ‘위한’ 추천이 아니라, 하나의 가부장제 사회‘의’ 분석이다.”

-줄리엣 미첼


“정신분석학은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는 진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만일 당신의 신경질적으로 비참한 기분을 우리가 치료를 통해서 일상적인 불행으로 변형시키는 일에 성공한다면 많은 것이 얻어질 것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참고문헌>


레몽 장, 이인철 옮김, 『오페라 택시, 세계사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김예숙 옮김, 성의 변증법, 풀빛

시몬느 드 보부아르, 이희영 옮김, 제2의 성, 동서문화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정신분석세미나팀,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 여이연

위키페디아 프랑스, https://fr.wikipedia.org/wiki/Raymond_Jean






나나

“사내아이를 낳아야 했어, 그래야 그럭저럭 살아 나가기 쉽고, 이 파리에서 수많은 위험을 겪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야.”

내가 태어난 날 우리 엄마가 나를 보고 되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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