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아이돌, 야동이거나 상품이거나.

by.광개토

 

 


한국의 미디어 제작자들은 여자 아이돌을 사람으로 대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듯하다.


 

Mnet <프로듀스 101>을 제작한 한동철 피디는 지난 7월 잡지 <하이컷>에서 남자들에게 건전한 야을 만들어주기 위해 해당 프로그램을 제작했다고 인터뷰했다. 그 말을 반증이라도 하는 듯, <프로듀스 101>의 참가자들은 교복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온갖 대상화의 시선에 재단당해야 했다. 한동철 피디는 논란이 가중되자 의도가 잘못 전해졌다고 해명했다. 한동철 피디는 어찌 보면 피디다운 명철함을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자 아이돌은 야동이거나 상품이다.

최창수 피디가 이끌고 있는 JTBC <아는 형님>723일 러블리즈 편에서 걸그룹 러블리즈의 멤버 케이와 프로그램 패널 강호동이 각각 데이트에 늦은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 역을 맡아 연기하는 모습을 내보낸다. 상황극에서 강호동은 죽고 싶어?’라는 협박과 함께 폭력을 휘두를 것 같은 위협적인 행동을 취한다. 이에 케이는 강호동의 손을 잡으며 애교를 선보인다. 마치 데이트 폭력 현장을 재현한 듯한 모습임에도 이 장면은 방송 후 케이의 애교에 집중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한편 SBS는 남성 패널들의 운명을 시청자가 직접 결정한다는 여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꽃놀이패>를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선보였다. 프로그램은 남성 패널 간 시청자 인기투표를 진행해 상위 랭크인 패널을 꽃길이라고 부르는 호화 여행길에, 하위 랭크인 패널을 흙길이라고 부르는 힘든 여행길에 서게 한다. 꽃길인 편안한 여행 코스 중에는 걸그룹 트와이스와 노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기가 많은 남성은 미모의 어린 여성들과 시간을 보낼 기회를 갖는다.

여자 아이돌은 데이트 폭력을 행사하려는 남자에게 화를 풀어주려 목숨을 건 애교를 부리거나, 인기 많은 남성의 승리의 트로피가 된다. 이 두 가지 소비 방식에서 벗어난 여자 아이돌은 찾기 어렵다. 한국 여성 아이돌의 시초인 S.E.S.가 데뷔한 지 약 20년이 지났고, 카라의 전 멤버 강지영이 SBS <라디오 스타>에서 애교 강요에 눈물을 쏟은 지 3년이다. 한국의 미디어 제작자들은 여자 아이돌을 사람으로 대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듯하다.

 

 


( 나혜석_저것이 무엇인고_신여자 제2호_목판화_1920 )

1920년대, 사회에 나온 첫 여성인 신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이 아닌

잠재적 연애대상이었다.


 

 

나이 어리고 예쁜 여자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대중 미디어가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남성뿐이던 회사에 나타난 여자직원의 역할을 알 수 없어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아직도 여름이면 여성들의 옷차림에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다며 히잡을 씌웠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성들은 그간 자신의 세계에 있던 두 종류의 여성-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족여성 혹은 창녀로 대표되는 성적 대상화된 여성-외의 여성을 낯설어 한다. 여성을 사람으로 대한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눈앞에 나타난 인간인 여성을 자기들이 아는 여성인 여자 친구 혹은 창녀로 읽으려 든다.

이런 사회적 풍조는 고스란히 대중 미디어에 투영된다. 특히 성 상품화와 대상화에 대한 담론이 끊기다시피 한 한국 여자 아이돌은 더욱 쉽게 노출된다. 무대에서는 섹시 디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왈가닥의 대명사였던 이효리가 결혼 후 참한 주부로 그려지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나이 어리고 예쁜 여자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대중 미디어가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걸스피릿>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14년 데뷔한 걸그룹 마마무는 음오아예발표 후 걸크러쉬의 대명사로 불리며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한 눈에 반했는데 알고 보니 여자였더라라는 내용의 가사와 뮤비는 여성 팬층을 확고히 했다. ‘걸그룹이라도 여성팬을 붙잡아야 한다. 그러면 남성팬은 자연스레 따라온다SM 엔터테인먼트 관계자의 말처럼, 성별을 막론하고 아이돌 그룹 기획자들은 여성 팬층을 붙잡는 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적어도 아이돌 시장에서 여성은 중요한 고객인 것이다.

팬 대부분이 여성인 아이돌을 기용하면서도 아이돌의 역할에 대한 고민 없이 콘텐츠를 만드는 행위는 제작자로서의 책임감이 결여된 기만적 행동이다. 팬들은 그저 방송의 꽃, 방송의 활력소, 방송의 장식 역할에 그치는 내 아이돌의 모습에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팬들의 화력(시청율, 인터넷 내 입소문 등)을 기대하며 아이돌 게스트를 섭외하면서, 아이돌과 팬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기울어진 성 역할을 여실히 드러내는 프로그램은 콘텐츠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 재미도 없다. <12>에서 무대 의상인 양말까지 신은 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남성 패널을 위한 노래와 춤, 애교를 부리는 트와이스의 모습은 군부대 앞에서 공연하는 걸그룹 이상의 감흥을 주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아는 형님> 속 강호동의 모습은 데이트 폭력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할 뿐 웃음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자라면 어떤 웃음이 현재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지 아는 기민함이 필요할 것이다. 과연 현 한국에서 폭력과 성적 대상화가 무해한 웃음이 될 수 있을까?

이런 분위기에 맞춰, JTBC는 최근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해본 적 없는 걸그룹 멤버들이 1위를 놓고 노래 실력을 경쟁하는 방송 <걸스피릿>을 내놓았다. 아이돌 시장의 포화로 노래할 무대가 줄어든 여자 아이돌들을 위해, <걸스피릿>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겨졌던 경쟁에 어린 여자들이 뛰어든다는 점에서 <걸스피릿>은 최근 나온 예능 방송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경쟁에 참여하는 12명의 아이돌 역시 서로에 대한 경쟁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야동도 상품도 아닌 목소리를 내는 여자 아이돌’, ‘질투가 아닌, 경쟁하는 여자 아이돌의 등장을 기쁘게 응원한다.  

 

 

필자 광개토.

광개토대왕님 만큼이나 넓은 (덕질) 영역을 자랑하는 이 시대의 페미니스트 덕후

최근의 즐거움은 세일러문 크리스탈과 오마이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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