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 태우는 여자들

 암탉


만화 재윤의 삶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굉장히 보수적인 기독교계 여자 고등학교였다. 여름이면 겉보기에 비치지 않는 얌전한브라에 브라를 가려줄 하얀색 민무늬 반팔 티셔츠를 입고 그 위로 또 하복 블라우스를 입어야 했다. 만에 하나 위의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선생님은 젖가슴 내놓고 다니지 말라며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지르곤 하셨는데, 너희들이 단정하게다녔으면 하는 마음에 일부러 수치심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내 몸엔 가슴이 달렸다. 이는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내 몸에 가슴이 달렸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여성의 가슴을 금기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나는 가슴을 가려줄 브라를 해야만 했다. 내가 브라를 착용한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브라를 했다는 사실이 티 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색깔이 도드라지는 브라를 하면 안 되고 브라를 가려줄 옷을 겹쳐 입어야 한다. 그마저도 브라 끈이 보일 수 있으니 끈 민소매는 금물이다. 브라를 가려줄 옷입고 등교하는 것도 금물이다. 그 위에 학교에서 규정한 하복 블라우스를 입고 단추도 풀면 안 된다. 조오신하지 않으니까.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걸까? 고등학생 암탉이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라의 시초는 나름 페미니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몸통을 꽉 조이는 코르셋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코르셋에 비유하듯, 코르셋은 여성 신체에 엄청난 위해를 가하고 있었다. 몸통을 비정상적으로 변형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소화에 지장을 줌은 물론이고 호흡 곤란을 유발해 질식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코르셋의 위험성에 대해 많은 의사들이 경고했지만, 이는 보통 촌스러운-패션 센스와 거리가 먼조언으로 받아들여졌고, (오늘날의 브라처럼) 여성에게 필수적인 속옷으로 여겨져 미착용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고 한다. ‘패션의 이름으로 여성의 허리-, 건강을 졸라매던 코르셋이 브라에게 밀리기 시작한 것은 1913년이었다. 당시 미국 사교계를 휘어잡던 유명인사 메리 펠프스 제이콥스는 저녁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정말 맘에 드는 드레스인데, 상체가 비쳐 코르셋을 착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를 포기하기 싫었던 메리는 손수건과 끈 몇 가닥을 이어 현대의 브라에 가까운 손수건 브라를 만들어냈다.

 

      

() 현대식 브라의 창시자 메리 펠프스 제이콥스, () 메리가 만든 즉석 손수건 브라

 

당시에도 여성의 신체를 감추기 위해 속옷을 착용해야 하지만, 그 속옷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모순은 그대로였다. 따라서 여성들은 불편한 코르셋을 착용하고, 코르셋을 감춰줄 수 있는 두꺼운 옷만을 착용해야 했다. 메리의 손수건 브라를 본 여성들은 열광했다. 가슴을 가려주면서도 무척 얇아 의복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기 때문이다. ‘패션이라는 매력적인 명목으로 여성들에게 다가간 브라는 삽시간에 코르셋의 자리를 빼앗았다. 여성들은 숨통을 졸라매는 코르셋의 악몽에서 벗어났지만, 상대적으로 덜 가혹해 보이는 브라의 지옥에 빠지게 됐다.

 


미스 아메리카 대회 폐지 시위 현장 (출처: 구글)


    ‘페미니스트하면 화난 여성들이 브라를 태우는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고정 관념의 시초는 1968년 행해진 미스 아메리카 반대 시위이다. 급진 페미니즘이 부흥하면서 브라, 하이힐 등 여성을 향한 물리적 구속을 거부하는 이들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여성의 몸을 성 상품화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남성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 분노한 페미니스트들이 미스 아메리카 대회장 앞에 모였다. 그들은 준비해온 구호를 외치며 미스 아메리카 대회를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Freedom Trash Can’에 브라, 하이힐 등을 내다 버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짜로 브라를 태우지는 않았다. 경찰의 진압으로 시위가 생각보다 빨리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브라 태우기 퍼포먼스(미수)’가 페미니즘 운동을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처럼 자리 잡은 걸까? 이건 공포감에 가깝다. 브라를 태우는 것 곧, 노브라 상태가 얼마나 무서우면 하나같이 공통된 진술을 읊는 걸까? “그 미친 여자들이 브라를 태우면서 (안 태웠다니까) 난동을 부렸어···.”라고 말이다.

 


    2015년 여름, 인스타그램 측에서 여성의 유두가 부적절하다는 규정을 내세워 여성의 가슴 사진만 대거 검열·삭제한 일이 있었다. 인스타그램 유저들은 이에 유쾌하게(?) 대응했다. #this is a male nipple 운동이 그것이다.

 

인스타그램,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세상은 무시무시한 여성의 젖꼭지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여성의 가슴에 남성의 젖꼭지만 합성한 사진

 

인스타그램 유저들은 #this is a male nipple 태그를 걸고 젖꼭지만 잘라 놓은 사진에 이것은 남성의 젖꼭지입니다.’라고 적어 놓거나, 브라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의 몸에 남성의 젖꼭지사진만 합성하는 등 인스타그램의 여성혐오적 규정을 비꼬는 사진들을 업로드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진들은 모두 인스타그램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가슴 차이 몰까...? 남성의 젖꼭지라는 사족이 달리면 사진의 유해함이 증발하기라도 하는 걸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건 공포감에 가깝다고.

 


    인스타그램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노브라 포비아들의 바람이 무색하게 요 몇 년 사이 한국에도 노브라 담화가 대두되고 있다. 언급하기도 식상하지만, 노브라 담화의 확산에 힘을 보탠 주역이 설리의 인스타그램 사진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작년 4, 설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노브라 차림의 사진을 업로드했다. 설리의 브라 착용 여부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댓글들이 (무려 9000여개 가량!) 이어졌다. 긍정적인 점은 이 일을 통해 노브라담화가 수면 위로 끌어올려 졌다는 것이다. ‘미친 꼴페미의 상징이었던 노브라 담화가 설리라는 유명 연예인 이슈의 탈을 쓰고 활발하게 소비되기 시작했다.

 

좀 더 편안한 형태의 브라, 브라렛. 정말 편할까? (출처: 구글)

 

노브라에 대한 관심이 좀 더 편한 브라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브라렛이 급부상한 것이다. 지난 회차에서도 말했지만 브라 선택의 완전한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설리의 인스타그램에 달린 댓글들처럼 쏟아지는 시선과 오지랖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브라의 부담감은 줄여주면서도 훨씬 편안한 브라렛은 훌륭한 대안이다. 많은 브랜드에서 브라렛을 내놓고 있고 내 주변에도 브라렛 전도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브라렛의 유행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찝찝한 것도 사실이다. 포털 사이트에 브라렛을 검색해보자. 편안한 착용감을 내세워 마케팅하고 있지만,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디자인의 브라렛이 대다수이다. 실제로 쇼핑몰을 둘러보면 까슬까슬한 레이스 탓에 피부가 간지럽다거나, ‘레이스가 힘이 없어서 오히려 더 불편하다는 댓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편안함을 위해 선택한 브라렛 마저 불편하더라도 남들이 보기에 예쁜디자인을 취하게 된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과거 브라가 패션의 이름으로 여성들에게 다가갔다면, 이젠 편안함이라는 좀 더 교묘해진 방법으로 여성들에게 다가가는 건 아닐까? 더는 엮이고 싶지 않은 덜 가혹해 보이는구속의 연속은 아닐까? 난 좀 더 근본적인 대안을 원한다.

 


    이쯤에서 2014년 개봉한 ‘Free the Nipple’(한국 개봉명 가슴 노출을 허하라)이라는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여성의 신체에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검열법에 항의하고자 노브라 시위를 진행한 활동가들의 이야기이다. 영화 중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전쟁과 여성의 가슴 중 무엇이 더 음란한가?”

 

미디어는 폭력, 살인, 전쟁 등의 비윤리적 행위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내보내면서, 여성의 신체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 그들, 곧 남성의 기준에 맞는 여성의 신체는 환영받고 선별적으로 노출되며 나아가 신격화된다. 하지만 여성이 주체적으로 내보이는 신체는 검열의 대상이 된다. 사회가 여성의 가슴을 신체가 아닌 성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감추라고 강요당한다. 폭력과 가슴 중 무엇이 더 음란한가? 음란한 것은 여성의 가슴을 음란하다고 낙인찍은 시선 아닌가? 성적 대상인 가슴이 아니라 우리 몸인 가슴을 되찾기 위해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필자소개

여태껏 내 손으로 덕질한 것 중에 페미니즘만큼 재밌는 게 있었나? 페미니즘에 강하게 치인 새내기 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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