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른 거 그거 완전 좋은 거 아니냐?>

암탉

 

    한국만큼 외모지상주의가 극에 달한 나라를 찾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지하철 플랫폼엔 성형외과 광고가 벽지처럼 도배되어 있고 화장은 예절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또한, 그 잣대는 유독 여성들만을 향해 날을 벼리고 있다. 여성의 신체를 부위별로 나누어 평가하고 여성들로 하여금 파편화된 여성상에 다가가도록 한다. 미의 기준에서 벗어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징벌은 가혹하다. (온갖 매체에서 미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연예인들이 외모로 인해 굴욕을 겪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 상황은 분명히 유도된 것이다) 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몸을 지배하는 여성혐오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 외모 꾸미기가 하나의 생존 전략이 된 셈이다.

 

    ‘몸을 지배하는 여성혐오의 대표적인 예시로 지난 회차에서 이야기했던 살찜 혐오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몸을 지배하는 여성혐오를 짚으며 마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다이어트의 성정치를 절반만 알고 넘어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번 회차에서는 마름 혐오’(Skinny Shaming)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 마른 거 그거 완전 좋은 거 아니냐?’, ‘마른 걸 누가 혐오해?’라고 생각했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마른여자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법

 

    난 168cm 45kg의 여자이다. 원래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라 딱히 운동하지 않아도 항상 이와 비슷한 몸무게를 유지한다.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살찔 걱정 없어서 좋겠다며 축복받은 체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의 삶은 몸무게에 대한 압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쭉 강박증을 가지고 살아왔다. 중고등학생 시절, 폐쇄적인 또래 집단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에게 외모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내 몸이 평균보다 말랐기 때문에 항상 나는 마른 애로 분류되었고, 때때로 내 이름이 아닌 몇 반 마른 애로 불리곤 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하나하나 나의 마른 몸과 연관 지어 그러니까 살이 안 찌는 거야’, ‘병원에 가봐’, ‘한약을 먹어봐등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일부 몰지각한 아이들은 걱정해준답시고 밥을 입에 쑤셔 넣기도 했다. 폭언을 일삼는 이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해골 같다’, ‘왜 이렇게 삐쩍 말라 비틀어졌냐’, ‘환자 같다는 식의, 듣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말들을 툭툭 내뱉던 아이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너는 내 옆에 서지 말라며 밀어내 무안할 때가 있다. 나를 두고 자신의 몸매와 비교하면서 우울해 하는 친구들도 많다. 내가 딱히 노력해서 마른 것도 아니고 유전적으로 살이 안 붙는 체질일 뿐인데 나에게 체형 유지 방법이나 식습관에 관해 물어보니 해줄 말이 없다. 원래 살이 안 붙는 체질이라고 대답했을 때 혼자만 알려고 하냐’, ‘치사하다는 반응이 돌아오면 난감하다. 이렇게 부러움 당하는상황에서 나는 굉장히 애매한 위치가 되어 버린다. 정작 나는 다이어트를 해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마른 몸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는데, 친구들이 나에게 너는 다이어트 안 해도 되니까 좋겠다는 말을 할 때면 내 몸에 대한 발언권을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Body Shaming(타인의 몸매를 비웃거나 비난하면서 수치심을 주는 행위[각주:1], 이하 바디 셰이밍)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여전히 나에게 너무 말랐다’, ‘살 좀 쪄라’, ‘밥 좀 먹어’, ‘혹시 다이어트하세요?’ 따위의 말로 운을 띄우는 이들이 있다. 23년째 듣다 보니 이제는 인사치레구나 할 정도로 익숙해졌을 뿐이다. 10대 때의 바디 셰이밍과 차이점이 있다면 성인이 된 후의 바디 셰이밍에는 남성에게 대상화되는 시선이 더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마르면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부터 너무 마르면 가슴이 작다는 성희롱 발언까지, 사회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난 내 몸이 말랐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관심 두고 싶지도 않고 별로 자각하고 살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네가 지금 어떠어떠한 몸 상태입니다.’, ‘너의 몸매가 어떻습니다.’하고 각인시켜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당당하게 말이다. 그들은 내 몸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없고 난 그들에게 내가 마른 이유에 관해 설명할 의무가 없다.

 

마름 혐오도 바디 셰이밍이야?

 

    바디 셰이밍 하면 보통 살찐 몸매를 향한 것을 떠올리게 된다. 마른 몸매를 향한 바디 셰이밍은 그와 약간 다르다. 마른 몸매를 향한 바디 셰이밍은 살찐 몸매를 향한 바디 셰이밍보다 더 당당하다. 보통 살찐 몸매를 가진 사람에게는 왜 이렇게 뚱뚱하냐’, ‘살 좀 빼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데 마른 몸매를 가진 사람에게는 너 왜 이렇게 말랐냐’, ‘살 좀 쪄라하는 식의 직접적인 지적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전자와 후자 모두 상대방의 몸매를 평가하는 행위이고 무례한 지적인 건 마찬가지인데, 후자의 경우 실례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아가서 본인이 하는 이야기가 칭찬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마름 혐오가 상대적으로 덜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마른 몸매를 가진 사람들은 자랑질이라는 오명 아래 바디 셰이밍을 바디 셰이밍이라고 말할 발언권조차 박탈당한다. 전시할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에 마름 혐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말라서 더 쉽다.

 

뚱뚱하면 뚱뚱하다고 지X, 마르면 말랐다고 X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란 없다. 미의 기준은 매우 모호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획일화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신체를 못생겼다고 평가한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과 상관없이 획일화된 기준에 다가가기 위해 약품, 수술 등 인공적인 방법이 동원된다. 외모 꾸미기 비용은 마치 세금처럼 여성들에게 부과된다. 병든 사회가 개인에게 외모지상주의라는 강박증을 뒤집어씌우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살과 뼈를 깎게 한다.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틀을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대상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이 개개인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여성의 신체를 부위별로 조각내고 상품화하여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환상의 틀을 만들고, 경쟁적으로 이 이미지에 부위별로 가까워지길 강요한다. 이런 사회에서 설리는 예쁘지만, 키가 너무 큰 여자고, 설현은 예쁘지만, 너무 까무잡잡한 여자다. 여성의 외모는 항상 흠결사항으로 읽혀, 그 여성이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의 외모가 항상 장점 혹은 매력으로 읽히는 것과 대조된다.)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준하는 여성이 존재할까? 나는 없다고 확신한다. 아름다움, 나아가 미의 신화 자체가 여성을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존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모든 사회가 여성에게 어떤 이상적 아름다움을 고취시켜 왔지만, 그 목적이 다수를 배제하는 것에 있으므로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다수가 그 이상에 다가서면 이상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또한, 나오미 울프는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에서 여성이 법적·물질적 장애를 돌파할수록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는 더 엄격하고 무겁고 무자비하게 여성을 짓누른다고 말했다. 무너져가는 남성중심사회를 유지하고자 아름다움이 정치적 도구로써 이용됐다는 것이다. 파도처럼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에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는 여성은 계급화하기 쉬운, 다루기 쉬운 여자가 된다.

 

    ‘살찜 혐오이든, ‘마름 혐오이든 그 근본에는 여성혐오가 자리 잡고 있다. 마른 몸매를 선호하는 사회에 사는 내가 마름 혐오를 겪게 되는 이유는 내가 마름이라는 방식으로 아름다운 여성의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살찜이라는 방식이든 마름이라는 방식이든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교정의 대상, 곧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어떤 길로 탈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무 뚱뚱한 사람 혹은 너무 마른 사람만 남는다.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다가가라며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것, 그것이 미의 신화가 의도한 바이다.

 

페미니즘이 나에게 준 해답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다 잡은 동아줄 같은 존재이다. 살기 위해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회가 살기 편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접해도 나처럼 절박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회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발 벗고 나서서 사회 구조를 분석할 수밖에 없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페미니즘은 타자화된 내 몸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힘이다. 페미니즘을 통해 나의 몸과 삶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방향성을 찾았다. 마른 내 몸이 기형적인 게 아니라 사회가 기형적인 것이다. Shame을 주는 Shameless들을 족치자.

 

이 글은 Sarah 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Sarah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필자 소개

여태껏 내 손으로 덕질한 것 중에 페미니즘만큼 재밌는 게 있었나? 페미니즘에 강하게 치인 새내기 페미입니다.

 


  1. 출처: Oxforddictionaries.co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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