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에게 자유를!>

암탉


마돈나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일부 미디어에서는 이 사진을 두고 기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까지 여자는 겨드랑이 털이 나지 않는 줄 알았다. 나도 겨드랑이 털이 나지 않았을 때였고, 이전까지 겨드랑이 털이 난 여자를 본 적 없었다. 당신은 언제 처음 여자의 겨드랑이 털을 보았는가? 난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처음이었다. 여름날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반팔을 입고 팔을 드는 순간, 담임 선생님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멈칫했다. 처음엔 저게 뭐지?’하다가 겨드랑이 털임을 눈치 채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너도 봤냐며 제각각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다음날 선생님은 겉옷을 걸치고 오셨다.

 

    왜일까? 왜 아이들은 선생님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수군대었고, 왜 선생님은 조용히 겉옷을 입고 오신 걸까? 나는 왜 선생님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에 휩싸였고, 여자도 겨드랑이 털이 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됐던 것일까? 난 왜 이전까지 여자의 겨드랑이 털을 접해볼 수 없었을까? 여자도 털이 나는 건 확실한데 왜 여자의 체모만 부끄러움과 금기,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우리들은 왜 제모할까?

    친구들에게 첫 제모가 언제였냐고 물어보니 대부분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를 꼽더라. 나도 같다. 살결이 드러나는 스타킹을 신고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어야 하는데, 털이 난 내 종아리가 부끄러워서 엄마에게 제모 용품을 사달라고 졸랐다. (제모 지옥의 시작이었다.) 서투른 솜씨에 피도 많이 났고 물이 닿으면 무척 쓰라렸다. 그래도 털이 보이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기에 만족스러웠다.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갈수록 나는 점점 더 다양한 영역의 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쯤부터는 막 난 여린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기 시작했고, TV에 나오는 제모 크림이 좋아보여서 제모 크림으로 다리털을 제모하기도 했다. 눈썹도 뽑아 정리하고 가끔은 눈썹 칼로 인중 털을 밀었다. 솜털 때문에 화장이 뜨는 것 같아 스트립 왁스로 볼에 난 솜털을 제모해본 적도 있다.

 

    제모를 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면도칼, 제모 크림 등으로 피부 위의 털만 걷어 내는 방식의 제모는 금방 털이 다시 올라오고 아차하면 다치기도 쉽다. 왁싱, 족집게로 모근까지 털을 뽑아내면 털은 느리게 자라지만 무척 아프다. 물론 이 방법도 오래가는 건 아니다. 레이저 반영구 제모 시술도 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고 이 방법 또한 아프다. 사람 따라 털이 금방 다시 자라버리기도 한다. 제모의 왕도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왕도를 찾아야 한다. 찾지 못했더라도 찾은 체 하라고 강요받는다. 그 비용과 고통은 고스란히 여성의 몫이 된다.

 

    얼마 전 약속 시간에 늦어 급하게 옷을 입는데, 따뜻해진 날씨에 맞게 짧은 옷을 입었다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말았다. 까먹고 제모하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긴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급하게 역으로 뛰어가다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 억울했다. , 털 만큼 죄책감 없이 혐오할 수 있는 신체 부위가 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부터 여자의 체모는 금기시되었을까?

    여성의 체모가 금기시된 역사, 즉 제모의 역사를 훑어보려면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의 기준 즉 이 털 한 올 없는 매끈한 피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노예나 이방인을 제외한 모두가 제모를 했다고 한다. 이집트뿐만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에서도 바닷조개를 족집게처럼 사용해 털을 뽑아내거나 불에 그슬려 태워버리는 방식의 제모가 유행했다. 기원전 500년 경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비디우스의 저서 사랑의 기교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연출하기 위해 종아리 털을 깎는 것은 필수 사항이라고 언급했다. 임산부의 조오신하지 못한 처신이 신의 노여움을 사 체모가 많은 여자아이를 낳게 한다고 믿고, 체모가 많은 여자아이를 학살하거나 구경거리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그리스, 로마의 제모 문화는 이슬람 사회로 건너갔다. 가부장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성인의 생리적 기능을 가졌더라도 권리를 행사하는 문제에 있어선 아동 취급을 받았다. 이슬람 사회는 여성의 성숙한 몸을 그 법적 지위에 걸맞게 끌어내릴 수 있는 상징적 절차로써 제모를 활용했다. 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털난 성기를 제모하게 해, 어린 아이의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1915년 질레트사의 여성용 면도기 광고. 

소매가 없는 여름 드레스를 위해 질레트사의 면도기로 '무례한 털'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건 100여년밖에 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여성 해방 운동이 급물살을 타면서 여성들은 불편하게 질질 끌리는 옷을 벗어던지고 짧은 치마와 짧은 소매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옷이 몸 전체를 감싸는 스타일이 유행했기 때문에 체모가 노출되지 않았고, 옷을 벗는 실내에서는 체모가 보여도 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여성들이 여성스러움을 잃을까 걱정했던 여성지 칼럼니스트들은 겨드랑이와 팔뚝의 털을 면도할 것을 권했고, 미국의 화장품 회사들은 여성의 체모가 해로운 박테리아의 온상이라고 낙인찍으며 탈모제를 내놓았다. 1915, 세계적인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가 최초의 여성 (겨드랑이용) 면도기를 발명하면서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는 광고 문구로 여성들의 털 혐오감을 부추긴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질레트의 혐오 조장 광고는 역겹게도 대성공을 이루어 1916년에만 782,028개의 면도기가 판매되었고 1917년에는 백만 개 이상의 면도기가 판매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전에는 어떤 미국 여성도 다리를 면도하지 않았지만, 1964년경에 이르자 44세 이하 여성의 98%가 다리털을 밀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완벽한 승리였다.

 

미디어에서 말하는 여성의 체모

    책 여자다운 게 어딨어의 저자 에머 오툴은 2012년 한 지상파 방송에서 18개월간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를 노출해 폭발적인 관심을 얻고 전국적인 스타로 거듭났다고 한다. (그 털 진짜냐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한다.) , 영화 <색계>를 검색하면 색계 줄거리, 색계 주인공 같은 그럴듯한 검색어들을 제치고 탕웨이 겨털이 연관 검색어 가장 상단에 올라 있다. 모두 여성의 몸에서 체모가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여성의 체모가 보이는 순간, 체모의 존재를 처음 안 것처럼 뻔뻔하게 굴곤 한다. 도대체 여성의 체모가 뭐라고 생각하기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까? 미디어에서 여성의 체모를 다루는 방식에 유념해야 한다.

 

    미디어에서 여성의 체모를 찾아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미디어에서 여성의 체모를 다룬다고 하면 대부분 개그 프로그램에서, 엽기적이고 비하적인 뉘앙스로 다뤄진다. 이는 유머로 소비되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의 체모를 지우고, 여성 신체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준다. 또한 이는 꼼꼼하게 제모된 여성 신체에 대한 숭배와 병행되어 여성에게 (제모 열심히 하라는) 경고 내지는 공포감을 심어준다.

 

    개그 프로그램 외에도 여성의 체모가 언급되는 미디어가 있다. 뷰티 프로그램이다. 뷰티 프로그램도 여성의 체모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개그 프로그램과 별 다를 바 없다. 개그 프로그램의 모멸적인 언어들을 정제해 돌려 말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무해한 척 여성들에게 다가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유해하다. 이러한 언어의 정제전략은 이전에도 널리 쓰인 적 있다. 한창 여성 제모 대중화를 주도하던 1920년대 질레트사는 민소매 댄스 드레스를 위한 에티켓’, ‘박테리아따위의 핑계를 대며 여성들에게 자기 신체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었다. 뷰티 프로그램이 곧장 뷰티 산업과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여성들에게 제모가 에티켓이라고 말하는 뷰티 프로그램의 배후에 뷰티 산업이 버티고 있다. 과거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지 않은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고 광고했던 질레트사처럼 말이다.

 

    만약 이 외의 미디어에서 우연히 여성의 체모가 노출된다면 그것은 방송 사고가 된다. 특히 아이돌, 배우의 경우 타격은 배가 된다. 여성의 체모는 우스꽝스럽고 비천한 것으로 여겨져 아이돌, 배우에게 요구되는 모든 이미지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털은 그냥 신체 일부일 뿐이다. 여성의 체모가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양 다루는 꼴을 보라. 명백히 여성의 신체를 향한 유해한 검열이다. 이는 여성의 체모를 죄악시하는 문화를 더욱 견고히 한다.

 

우리들은 제모해야 할까?

 

영화 러브 픽션 中

 

    영화 <러브 픽션> 중 희진(공효진 역)이 애인 주월(하정우 역) 앞에서 당당하게 겨드랑이 털을 내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희진은 당황하는 주월에게 이게 (겨드랑이 털이) 뭐가 어떻냐고당당하게 되묻고, 주월은 그런 희진에게 더욱 마음을 빼앗긴다는 내용이다. 이 장면에는 다소 슬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다. 공효진은 <러브 픽션> 언론시사회에서 영화 속 겨드랑이 털은 사실 가짜였다고 밝혔다. 원래 감독의 요구는 공효진의 진짜 겨드랑이 털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공효진도 이에 동의했지만, 촬영 일정이 다가오자 부담감이 들어 거절했다고 한다. 만약 공효진이 아닌 하정우가 겨드랑이 털을 내보이는 내용이었다면 그는 공효진과 같은 고민을 했을까? 아니, 애초에 남성의 겨드랑이 털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서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고민해볼 거리가 하나 생긴다. 우리는 앞에서 여성의 체모를 죄악시하고 제모를 강요하는 문화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것임을 합의하고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모하면 안 되는 걸까? 결국 제모하기로 결정내린 공효진을 비난해야 할까?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제모에 대한 고민도 커진다. 제모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구속인 건 알겠는데, 제모하지 않은 여성을 흉보는 이들 앞에 제모하지 않은 내 살갗을 내놓긴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본질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자. 우리는 여성을 구속하는 미의 신화, 그리고 그것의 다양한 발현을 지적하려는 것이지 그것을 수행하는 여성을 질타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털이 난 상태 혹은 제모한 상태를 자유롭게오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현 상황은 타인의 개입 없이 온전히 내 의지에 따라 제모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인가?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지 않은 여성이 지하철에 타 손잡이를 잡는 상상을 해보라. 칸 안의 사람들이 그의 겨드랑이를 힐끔거리고 불경하게여길 것은 뻔하다. (제모하지 않은 여성을 향한) 조롱과 (조롱을 피하기 위한) 검열이라는 두 선택지만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자랐다. 부끄러움을 내재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부끄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가 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자율성이 결여된 선택을 한 이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정말 고민해봐야 할 것은 왜 제모라는 선택지가 등장했고 강요되는가, 나는 왜 털이 난 그대로의 상태 혹은, 제모한 상태를 편하게 여기는가 하는 점이다. 미의 신화 담론의 의의는 제모를 해라, 말아라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미의 신화를 인지하고 미의 신화가 의도한 바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제모하든 말든, 염색하든, 파마하든 모두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은 없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봊대로 행동하자.

 

참고 문헌

: 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 다니엘라 마이어, 작가정신

아름다움의 발명, 테레사 리오단, 마고북스

여자다운 게 어딨어: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에머 오툴, 창비 


필자 소개

여태껏 내 손으로 덕질한 것 중에 페미니즘만큼 재밌는 게 있었나? 페미니즘에 강하게 치인 새내기 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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