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아무도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by.한의 민족


페미니즘을 알기 전까지 나는 소위 '개념녀'였다.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 남녀평등은 이미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정성별 여성임에도 선별적 낙태를 당하지 않았고, 남자 형제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지 않아도 됐으며, 남자 아이들과 동등하게 의무교육과정을 이수한 90년대 생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내가 만나는 남자아이가 가지고 있는 권리는 당연히 나에게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생물학적 차이를 떠나 똑같은 인간으로 보였다. 똑같은 권리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같은 몫을 부담해야 한다고, 그게 공평한 것이라고 믿었다. 남자와 여자는 공평하게 더치페이를 해야 하고, 여자에겐 의무가 아닌 군대를 가는 남성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단순히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담해야 하는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내가 '평등하다고 생각한' 세계에서 편한 삶을 살았고, 굳이 여성학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내가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대학 선배의 추천으로 여성학 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세미나를 했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신은 여남 임금 격차가 36.6%나 난다는 사실을 알았는가? 한국 남성이 한 번이라도 성매매를 해 본 경험이 다른 나라의 남성들과 2배 이상 차이를 내며 당당하게 1위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나는 미처 몰랐었다. 첫 세미나를 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수치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이 여혐민국에서 남성중심적으로 사고하도록 사회화된 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 충격이랄까.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스스로를 검열하고 남자들을 정당화시켜주었는지 깨달았다.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인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페미니스트는 이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불평등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난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 나는 여전히 "빻은" 말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피하려고 한다. 어쩌면 정신력을 소모해야 하는 논쟁이 귀찮았던 것일지도 모르고 아직 스스로가 자신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만 한다. 나의 목소리가 나의 행동이 모여 사회를 바꾼다. 행동력이 절실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내가 적을 두고 있는 자대 여성학 동아리에는 최근 신입생이 폭발한다. 많은 학우들이 혐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동아리에 가입했다고들 말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동감과 연대의 손수건을 휘날리며 이 코너를 기획했다. 이 코너는 주제별로 빻은 반응에 대처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과 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책과 자료를 함께 기재할 예정이다. 페미니스트에게 팩트는 가장 좋은 무기니까!

 

<1. 아무도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혐오? 난 여자 좋아하는데? 난 여성혐오자 아니야.

a) 너는 '여성혐오'가 뭔지부터 찾아보고 와야겠다.

b) '여성혐오''미소지니misogyny'의 번역어로 하나의 단어야. 여성+혐오가 아니라고.

c) 여성숭배라는 의미를 지닌 필로지니philogyny 또한 여성을 타자화시킨다는 점에서 여성혐오란다.

 

앵그르-그랑드 오달리스크 

(출처:구글)


여성혐오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없다.

 

싫어하고 미워함을 뜻하는 국어사전의 혐오라는 단어와 여성혐오의 혐오는 전혀 다른 단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여성혐오(misogyny)란 여성을 다른 존재로 보이게 만들어 분리된 존재로 부각해 남성 집단에 대해 낯선 존재, '타자'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여성에 대한 '타자화'는 여성을 남성에 비교하여 이질적인 면을 부각해 공동체에서 소외되게끔 만들어 대상을 하나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만들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잃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여성을 좋아한다. 혹은 여성숭배의 의미를 지닌 필로지니(philogyny) 또한 여성을 타자화시킨다는 점에서 여성혐오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멸시나 업신여김, 또는 여성에 대한 편견뿐만 아니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열등한 존재, 위험한 존재 또는 성스러운 존재 등으로 여기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는 '여성혐오'의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언능 예쁜 색시 데려와서 엄마 손에 물 안 묻히게 해줄게! 내가 이렇게 효자인데 여성혐오자라니?

a) 예쁜 색시 대리효도시킬 생각 말고 효도는 셀프로 하기~

b) 여성을 사적 영역(가정)으로 몰아넣으면서 여성 억압이 시작됐어. 여성=가사노동을 할 노예로 생각하는 건 여성혐오야.

c) 다른 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가사일을 가사일을 할 사람이 없니? 남자인 너도 설거지는 할 수 있잖아!

 

(출처: 페이스북)


남성의 커리어는 여성의 죄책감에 기생한다.

 

어머니를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결혼을 한다는 것은 여성을 노예로 보고 있다는 인식의 표출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아내로 이어지는 가사노동의 세습은 가부장제를 답습하고 여성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확실히 말하지만, 집안일은 여성만의 일이 아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그렇게 구조화되었을 뿐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여성의 운신 범위를 사적 영역-가정-으로 제한하고 공적 영역-직장-은 남성이 독점하였으며, 이러한 공-사 이분은 여성억압의 기반이 된다고 말한다. 남성들은 공적 영역을 독점하기 위해 여성에게 맡긴 가사노동을 후려치고 평가절하 했다. 그 결과 여성은 직업과 정기적인 소득을 잃어버렸고, 남성이 벌어온 소득에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이윽고 남성의 '벌이'에 감사하며 '벌어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은 가사 노동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노예가 되었다.

여성혐오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이 자주 제시하는 증거로써 어머니를 위하는 '효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낳아주고 길러준 불쌍하고 가여운 우리 어머니의 보드라운 손을 되찾기 위해 결혼을 하겠다는 남자들의 변명은 웃기지도 않는다. 어머니 손에 물 안 묻히게 하는데 색시가 왜 필요한가? 본인이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것이 더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아닌가?



(퇴근하면 3시간 집안일에 녹초.."한국남자와 결혼? 말리고 싶죠" <파이넨셜 뉴스> http://www.fnnews.com/news/201507021717168881)

심지어 맞벌이 가정에서조차 여성은 하루 평균 가사 노동에 3시간 13분을, 남성은 40분을 쓴다는 통계청 수치가 있다.

 


난 내 여자 친구가 짧은 치마 입으면 내가 코트로 가려주는데? 내가 이렇게 여자한테 매너 있는 남잔데 어떻게 여성혐오자라는 거야?

a) 남이 짧은 치마 입겠다는데 니가 뭐라고 난리신지?

b) 매너 있는 행동이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 구조를 숨기고 있다는 거 알아?

c) 어딜 남자가 경망스럽게 코트를 함부로 막 벗고 그래?

 

호의? 누가 마음대로 호의래?

 

묻고 싶다. 왜 여친의 짧은 치마를 본인의 코트로 가려주는 행위가 '매너 있는 행동'이 되는지? 당신의 여자친구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대로 타인에게 전시할지 말지를 정하는 작품-심지어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낭만적 사랑' 역시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임을 강조한다. 여태까지 여성은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억압됨으로써 남성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경제적·사회적 억압만으로는 더는 그러한 의존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낭만주의'라는 문화적 장치가 도입된다. 낭만주의적인 사랑 속에서 여성은 '거짓 숭배'된다. 가령 테이블에 앉을 때 여성에게 의자를 빼준다거나, 문을 잡아준다거나, 여성의 치마를 코트로 가려준다거나 하는 낭만적인-매너 있는- 행동은 당장 여성들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느끼게 하지만, 그런 행동들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경제적·사회적 억압을 해결해주지 않을뿐더러, 실질적인 억압 구조의 존재를 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낭만주의는 여성이 그들이 처한 실질적인 경제적, 사회적 억압 구조를 알지 못하게 막는 남성권력의 문화적 도구이다.

종종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호의가 무례하고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동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특히 소위 '매너'라고 칭해지는 이러한 행동양식은 호의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지적하기도 곤란하다. 그러나 남성은 '호의'라는 명목하에 여성을 통제해왔고, 여성을 순종적인 존재로, 수동적인 존재로, 스스로 검열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모든 개인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것이 범죄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어느 누가 주체적인 개인의 자유 의지를 규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짧은 치마를 입고 싶은 사람은 입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짧은 치마를 코트로 가려주는 '매너'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여성혐오의 한 갈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도 여자지만 솔직히 여자들 감정적이고 예민한 거 인정한다난 그래서 남자애들이랑 노는 게 더 편하더라. 걔네는 그런 게 없거든.

a) 모든 여자들이 다 감정적이고 예민한 건 아닌데 왜 확대 해석해서 일반화하세요?

b) 너도 감정적이고 예민한 적 있지 않니? 사람이면 누구나 그래~

c) 너 지금 여성혐오하고 있는 거 알아? 여자도 여성혐오를 할 수 있어.

 

아무도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성도 여성혐오를 할 수 있다. 여성을 열등하고 기생적인 계급으로 정의하는 남성이 운영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남성의 승인을 받지 못한 여성은 불행하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의 여성혐오는 주로 자기혐오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기혐오가 아닌 다른 방식의 여성혐오를 하기도 한다. 본인은 예외적인 여성이 되어 타자화한 다른 여성을 혐오함으로써 그 혐의-열등하고 기생적인 존재로서의 여성-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소위 '명예 남성'은 이렇게 태어난다.

이들이 자신을 제외한 여성 집단을 혐오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감정적이고 예민해서, 외모에만 관심이 많고 다른 데에는 무지해서, ㅇㅇ해서, ㅇㅇ해서. ㅇㅇ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는 큰 상관이 없다. 그것은 단지 스스로를 특별한 '예외'로 만들기 위한 발판일 뿐이다. 그들은 여성에게서 보이는 일부의 특성을 여성 일반으로 확대하여 혐오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은 그 열등한여성 일반과 차별화된, 우월한, 특별한 개인이 되기를 원하며, 기득권층인 남성 사회의 인정을 받고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문제는 그녀 또한 남성 집단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잘해봐야 표면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으나 동지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다. 오히려 이들은 남성 집단에 의해 차별구조를 온존하고 지속적해서 재생산하'특권적인 예외'로써 이용될 뿐이다.

여성의 부분적인 특징을 여성 일반의 특성으로 확대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여성을 하나의 집단화하여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의 한 방식이다. 여성이 갖는 특정한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런 특성을 보이도록 만든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이 우선해야 한다.


-필자 소개: 한의 민족.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서 매일 흑흑거리고 부들부들거리며 살고 있다. 

-코너 소개: 저는 저런 말을 들었을 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미리 시뮬레이션 해뒀다가 실제로 그런 말 들었을 때 당황하지 말고 카운터 펀치를 날리기 위한 코너입니다.

+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