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짓누르는 살

암탉

 

    내가 요즈음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스트레스받는 것은 자소서도, 면접도 아닌 외모 꾸미기이다. 사회에서 말하는 취준생의 틀에 내 모습을 맞추면서 개성이 지워지는 것 같아 씁쓸했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기준에 내 모습을 맞추는 것이 처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릴 적 다 컸네! 미스코리아 나가도 되겠다.’는 동네 어른들의 인사말부터 넌 여자애가 맨날 후드티만 입고 다니냐? 좀 꾸미고 다녀라는 남자 선배의 말까지, 의식하지 못했을 뿐 내 몸을 둘러싼 사회적 담화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외모 이야기가 지겨워졌다. 거울을 통해 바라본 내 몸이 정말 몸인지 의문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몸을 되찾고, 내 주위를 맴도는 진정한 여성의 몸이라는 망령을 떨쳐내고 싶다. 그래서 떠들기로 했다. ‘진정한 여성의 몸이 아닌 내가, ‘여성의 몸에 대해. 5호부터 함께할 새 코너 <내 몸 탈환기>에서는 여성의 몸, 즉 외모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에 대해 20대 여자 대학생의 시선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대학교 가려면 살 빼야 돼!”

 

    고3이 되고 본격적인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공부만 하다 보니 살이 찌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눈에 띄게 통통해진 내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참기 힘들다는 듯 (그들의 말에 따르면)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여자애가 왜 이렇게 살이 쪘니! 그래도 고3이니까 괜찮아 대학 가서 살 빼면 되지~”

 

    나는 졸지에 고3이라는 신분을 빌어 내 몸의 살찜을 허락받은 꼴이 됐다. 내 몸의 상태조차 누군가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사회, 그곳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였다. 그들은 어떠한 기준을 정해 놓고 날 그 기준에서 벗어난 반항아 취급했다. 3이라는 신분을 빌어 살찜이라는 일탈을 허락해줄 테니, 언젠가는 끝내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갑자기 찐 살을 두고 마치 시한폭탄이라도 떠안게 된 것처럼 빨리 떨쳐내라고 구는 것이 싫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고3이라는 살찜 면죄부를 박탈당하면서 합격 축하한다는 말보다 대학교에 가려면 살 빼야 한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합격 발표가 나고도 다이어트하지 않는 나에게 엄마는 답답하다. (네 몸) 더는 못 봐주겠다.”고 했다. 마치 내가 마름을 빚지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엄마 때문에 심란했다. 내 몸은 봐주지 못할 잘못된 몸인가?

 

빼앗긴 몸에도 봄은 오는가

 

    대학교 1학년 때 들어간 동아리는 Body shaming의 장이었다. 엄마의 닦달에 못 이겨 어느 정도 체중 감량을 하긴 했지만, 동아리 친구들 사이에 서보면 내 다리는 꽤 통통한 편이었다. 이런 내 다리를 두고 왜 치마를 입냐?’, ‘상체만 보면 괜찮은데 하체를 보면···.’ 하는 식의 발언들이 오고 갔다. 초면에 묻지도 않은 다이어트 방법을 알려주는 이도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당신은 내 몸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고 쏘아붙였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면 동아리의 분위기를 망치게 될까 무서웠다.


    여성의 몸은 주인 없는 땅처럼 많은 이들로부터 침범당한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기에 간섭당해도 되는 몸이다. 특히 여성 비만인은 마름의 기준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에서 모두 벗어난 완전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몸은 사회적으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여 체제를 어지럽힌다. 이렇게 비체화된 몸은 손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회는 기준에서 벗어난 여성들의 몸을 이질적이라고 판단하여 기준 안에 짜 맞추기 위해 지적을 아끼지 않는다. 나아가서는 충격요법이랍시고 비난을 일삼기도 한다. 여성들의 몸은 사회적으로 빼앗겼다. 말 그대로 전쟁터와 다름없다.

 

* 비체(abject)란 대상(object)~이 아닌을 뜻하는 접두사 ‘a-’를 붙여 만든 단어로 주체(subject)도 객체(object)도 아닌, 경계를 넘나들며 정체성, 질서, 체계를 어지럽히는 것들을 말한다.[각주:1]

 

비혐(비만 혐오) 사회에서 살아남기

 

    광고 수업 시간이었다. 교재 한 귀퉁이에 실린 조그만 예시가 눈에 띄었다. ‘내 몸매 완전 착해라는 카피의 핸드폰 광고였다. 이미 관용어로 자리 잡은 착한 몸매라는 말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몸의 생김새를 옳고 그름, 착하고 나쁨으로 나눌 수 있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몸무게는 이미 윤리의 범위 안에 속해 있다.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먹으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야식 섭취는 양심 없는행동이다. ‘회개리카노라는 단어를 아는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의 회개와 아메리카노의 합성어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그동안 섭취했던 칼로리가 0으로 초기화된다는 농담에서 파생된 신조어이다. 고칼로리의 음식을 먹고 지방분해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회개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살찜을 죄악시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살찜에 대한 비판적 정당성을 제공하고 나아가 외모지상주의를 더욱 공고히 한다. 살찜은 죄악이고 양심 없는짓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연장선에 비만 여성을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풍토가 있다. TV를 켜면 내 또래의 비만 여성을 찾아볼 수 없다.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나 식습관을 희화하여 개그 코드로 소모하는 코미디언뿐이다. 그들이 비만 여성이기 때문에 소외되고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게 소름 끼친다. 장군 어깨, 드럼통 허리, 무다리 등등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해 비하하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쓰이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비난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당연한 나라이다. ‘뚱뚱한 여자그 자체이므로 그들을 혐오하고 괴롭히는 데에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한 사람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비만 여성을 괴롭히고 비하하며 시청자들의 웃음을 이끌어 내는 풍조는 현실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비만 혐오도 우아하게 할 수 있다. ‘자기관리라는 마법의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관리의 미명 아래 누구나 우아하게 비만인을 혐오할 수 있다. 자격지심 따위의 말을 붙여 상대방을 간단하게 프로 예민러취급하거나, ‘널 생각해서 말해주는 건데~’로 운을 띄움으로써 상대방의 입을 원천 봉쇄해버리면 된다. 여기서 널 생각해서 말해주는 건데~’내가 지금부터 너의 몸을 평가하고 참견할 건데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포장해놓았으니 내가 네 몸을 비난해도 욕하지 마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기관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기준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또한 자기관리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그 잣대를 들이댈 권리도 없다. 사실 타인의 몸매를 지적하는 이들이 정말 자기관리 때문에 타인의 몸매를 지적하는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여성이 열등해서 2등 시민이 됐다는 것처럼 자신의 근본 없는 비하 발언에 타당성을 부여해 줄 가장 적합한 말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재생산될 뿐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와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여성을 착취하고 미의 신화라는 감옥 안에 가두어버린다.


    살은 그냥 살이고 몸은 그냥 몸이다. 어떠한 죄악이나 잘못도 아니고 옳고 그름의 개념도 없으며 그 사람의 행복함이나 게으름을 보여주는 정확한 지표가 되지 못한다. 설사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외모를 평가하고 비하하는 행동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 줄 수 없다.

 

    남들의 기준에 내가 나쁜몸매일지라도 난 착한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받을 수도 있다. 나에겐 모든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하는 몸매를 갖고 사회적 아름다움을 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 사회가 나의 몸을 잘못됐다고 결정하고 부끄러워하길 강요할지라도 난 내 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가치중립적인 내 몸에 부정적인 가치를 덮어씌우는 것은 사회이다.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가 사회에 되물어볼 차례이다



필자 소개 

여태껏 내 손으로 덕질한 것 중에 페미니즘만큼 재밌는 게 있었나? 페미니즘에 강하게 치인 새내기 페미입니다.

  1.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201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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