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주의와 탈식민주의 협주곡 제1번 페미조

(Ecologism and Postcolonialism Concerto No.1 in Feminism)

최존

 

  

  내가 채식주의를 행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페미니스트를 바라보는 뭇 사람들의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괴짜다.

유난이네.

누가 알아준다고 힘들게 그래.

너 하나 그런다고 세상이 얼마나 바뀔 거 같아?

 

  누군가가 채식주의자든 페미니스트든 가장 힘든 건 주변 사람들의 냉소가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괴롭거나 힘든 일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 신념을 거스르는 게 더 힘든 법이다.

  너무나도 쉽게,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내가 먹고 있는 음식 하나에 얼마나 많은 코드가 담겨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내 눈 앞에 놓인 음식은 그저 내 배를 채우고 만족감을 선사하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수많은 의미들을 읽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삼키던 걸 잠시 멈춘 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무엇인가를 먹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삼킬 수는 없게 된다.

  지금은 채식을 하고 있지는 않다. 바깥에 있는 시간이 길거나, 일정 상 시간이 없으면 아무래도 채식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저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을 갖고 계속 실천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채식을 시도할 예정이다.

 

  페미니즘 내에서도 비주류인 생태주의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성주의와 관련된 논문들을 섭렵하던 중, ‘여성주의와 채식주의라는 논문을 읽게 된 것이 계기였다. 기존의 생태여성주의의 한계점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채식주의적 생태여성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논조의 글이었다.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페미니즘이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학문이라면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그 사고의 확장판 같았다. 미소지니스트(Misogynist)들이 남성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우월하고 강한 남성열등하고 약한 여성으로 인간을 구분해왔다면, 종차별주의자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을 대립된 것으로 바라본다. 그들에게 자연은 인간에게 종속된, 개발의 대상일 뿐이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철폐하자고 외치면서 그 외의 억압은 도외시하는 것은 일종의 위선이 아닌가 싶었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탈식민주의는 서구-문명-남성적VS()서구-야만-여성적과 같은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나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경험이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토대로 크게 작용했다.

  대학교 1-2학년 때 외국인 유학생을 도우는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아시아 출신의 여성들이었다. 어쩌다보니 터키에서 온 유학생과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어 그 친구의 친구들과도 같이 어울리고, 방학 동안 터키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내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던 무슬림에 대한 편견을 마주하고 깨트리는 데 아주 크게 작용했다. 이전까지 나는 무슬림 여성들을 수동적이고 억압받는 피해자라고만 생각해왔다. 물론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기만 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일례로 내 친구의 가족과 그 친척들의 모습을 보자면, 집에 손님이 왔을 경우,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 모여 밥을 먹는다. 얼핏 들으면 식사자리에서도 차별과 억압이 행해지는구나 싶겠지만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 남자들은 좁은 방에서 식사만 하는 반면, 여자들은 넓은 방에서 요란스럽게 식사시간을 즐기고는 했다. 손님이나 친구를 초대하여 흥을 나누는 것도 주로 여자들이다. 또한 난 그전까지 무슬림 여성들이 담배 피는 걸 상상도 못했는데, 다들 담배도 거리낌 없이 피우고, 신나게 엉덩이춤도 추고, -오신하지 못하게 서로 발길질을 하며 노는 것이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보며 내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물론, 터키가 세속국가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해 자유로운 면이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슬림 여성들에게서 수동적이고 억압받는 피해자의 이미지만을 투영하는 것은 지나치게 서구중심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다.

 

(▲ “Your Body is a Battleground”,1989, ©Barbara Kruger/The Broad)

   

  탈식민주의는 어떤 지역 간, 국가 간의 역학관계에서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여성의 몸은 전쟁터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1980년대에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외치며 나온 구호이다. 탈식민주의의 관점에서도 이 말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 식민주의 담론 중 하나가 자연’, ‘순수로 대표되는 피식민지 지역을 근대화된 서구의 손길로 정복하고 문명화하는 것이 계몽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몸을 남성, 그리고 남성중심주의의 사회가 식민화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역시 탈식민주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가 타투(Tattoo). 나는 타투에서 몸의 정치학에 해당하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사회가 만든 아름다움을 위해 여성이 성형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는 신체변형은 자연스러운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러한 미의 기준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그림을 그린다든가 피어싱을 하는 등의 신체변형(Body Modification)’추한 것’,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이러한 편견과 낙인은 특히 여성에게 더욱 엄격하게 작용한다. 때문에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타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요새 구상하고 있는 타투 디자인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에 메두사의 얼굴을 합친 것이다. 모두가 숭상하는 미의 상징인 비너스에 쳐다보기만 해도 온 몸이 돌로 굳는 추한 메두사의 얼굴의 조합이라니, 정말 멋지지 않은가!

 

 

 

이 글은 이슬(YouTube ‘페민이스트계정 운영자)’님의 사연을 바탕으로 구성됐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이슬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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