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빠가 여혐러일까요? (벌벌)

by.광개토

 



인터넷의 덕밍아웃 서사는 덕후임을 들킨 뒤의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고등학교 친구들 중 몇몇은 내가 더 이상 편안한 덕질 라이프를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소위 말하는 덕밍아웃을 감수하면서 덕질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오빠 사진으로 된 핸드폰 배경화면을 숨기기에 급급하고 언니 사진이 가득한 자취방에 친구를 들일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앞으로 조심해서 덕질을 해야 겠다 마음먹었지만 n년 간 일반인 코스프레라는 걸 모르고 살았던 내가 그리 쉽게 본능을 숨길 수 있을 리 없었다. OT 자리에서 흥이 겨운 나머지 나는 아이돌 덕후임을 밝혔다.

인터넷의 덕밍아웃 서사는 덕후임을 들킨 뒤의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조별 과제에서 대놓고 왕따를 당할까? 나를 뺀 단체 메신저 방을 만들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덕질을 숨기라는 경고가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 덕후임을 숨기지 않는 나를 조롱하거나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덕후인 친구들이 늘었다. 대학은 콘서트를 가든 밤새 아이돌 예능을 보든 상관없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덕질은 대학생활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많은 덕후들을 만나면서 내가 얻은 프리 덕질 라이프가 여대라서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공학에 다니는 친구들은 정말 인터넷에서 보던 덕질을 숨기는 여대생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었다. 아직도 아이돌을 좋아하는 행위를 마치 10대 시절 철없는 여자애들이나 하는 모습으로 격하시키는 사회 분위기가 분명히 존재한다. 숨길 이유가 없는 당당한 취미생활임에도 불구하고 20대 여자들은 아이돌 팬질을 하는 자신을 지운다.

이런 배경을 두고 <디지털 싱글 : 페미아이돌>을 발매해보기로 했다. 이 코너에서는 앞으로 3개월 동안 페미니스트 여대생 덕후가 보는 K-아이돌과 팬 문화를 써볼 예정이다. 디지털 싱글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작지만 꽉 채워서.

 


여성혐오라는 유령이 남자 아이돌 팬덤을 떠돌고 있다.


 

플레디스 소속의 일 년 차 보이그룹 세븐틴은 최근 그룹 리얼리티 예능인 <세븐틴의 어느 멋진 날>을 찍었다. 섬이라는 고립된 장소에서 열 세 명의 멤버들이 직접 식재료를 구하고 요리해 살아남는다는, 일종의 생존기였다. 확고한 캐릭터를 가진 멤버들이 좌충우돌 부딪히며 섬 생활을 해내는 모습은 기존에 볼 수 있던 무대 위주의 방송이 아닌 실생활의 멤버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세븐틴의 인기를 실감한 제작진은 본편을 종영한 뒤 편집본을 이어붙인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내보낸다. 이 비하인드 방송에서 제작진은 세븐틴 멤버들을 대상으로 이상형 올림픽을 진행한다. 제작진이 두 가지 타입의 여성을 제시하면 멤버들이 본인의 이상형에 가까운 여성을 선택하는 형식이었다. 제작진은 순댓국 먹는 여자vs파스타 먹는 여자라는 선택지를 제시하고 멤버들 중 다수는 순댓국 먹는 여자를 선택한다.

선택지가 께름칙하긴 하지만 자신과 식성이 비슷한 사람을 꼽을 수 있다고 양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내가 파스타를 좋아하니까라고 답한 멤버는 소수였다. ‘순댓국을 먹는 여자는 파스타도 먹을 수 있지만 파스타 먹는 여자는 순댓국을 못 먹을 것 같다라는 한 멤버의 발언은 여성을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 고정관념 속에 가둔다. 이제는 오래된 혐오 프레임인 비싼 파스타와 커피를 즐기고 명품백을 밝히는 된장녀를 떠올리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저런 선택지를 제시한 제작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순댓국 먹는 털털한 여자 vs 파스타 먹는 우아한 여자였을까? 순댓국 먹는 우아한 여자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빈약한 상상력인가.

세븐틴의 순댓국은 트위터 실시간 트랜드에 오를 정도로 활발한 논쟁이 진행됐다. 그만큼 여성혐오 의혹(?)은 팬 대부분이 여성인 남자 아이돌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여성혐오 의혹은 현재 인기 고공비행 중인 방탄소년단도 피해가지 못했다. 힙합 아이돌을 표명하는 방탄소년단은 랩 가사는 물론 곡의 프로듀싱 전반에도 참여할 정도로 앨범 제작 참여도가 높다. 특히 랩퍼인 멤버들은 본인의 벌스(verse)를 대부분 직접 작사한다. 이런 상황에서 방탄소년단의 앨범 수록곡 가사가 여성혐오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음식을 눈으로 먹냐 여자애들처럼

사진 좀 찍지 마라 내 입맛 떨어져

-핸드폰 좀 꺼줄래

 

명품백을 쥐기보다는 내 손을 잡아주는

질투심과 시기보단 됨됨이를 알아주는

그런 너와 함께 우리의 미래를 그려봐

-miss right

 


위의 가사를 시작으로 멤버가 낸 믹스테입의 가사가 여성혐오로 지적받거나, 운영하고 있는 트위터 계정에 올린 멘션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의 팬들 중 일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소속사와 방탄소년단에 피드백을 요청하고 있다. 주로 트위터 계정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들은 얼마 전 아이돌로지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내 아이돌이 여성혐오를 한다는 사실도 속상한데, 더 속상한 것은 여성혐오 사실이 팬덤 간 세력 싸움에 이용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아이돌 전성시대. 크고 작은 기획사에서 아이돌들을 데뷔시키고 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아이돌을 예뻐하기도 모자란 시간, 다른 그룹 팬들이 내 아이돌을 물어뜯을 구실을 넘겨주기 싫어서라도 여성혐오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동시에 타 그룹의 멤버가 여성혐오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눈에 불을 켜고 마이너스 덕질을 하는 팬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같은 그룹의 팬들 사이에서도 여성혐오는 민감한 사안이다. 내 아이돌의 행동이 여성혐오적이라는 점을 비판하면 정말 이 그룹의 팬이 맞냐?’는 사상검증이 시작된다. 무조건적으로 내 아이돌이 옳다고 말해야만 하는 폐쇄적인 분위기는 남자 아이돌 팬덤 특유의 아이돌에 대한 높은 충성도와 더불어 위에서 짚었던 것처럼 세력 싸움이나 안티 팬들과의 기싸움과 무관하지 않다. 몇몇 팬들은 여성혐오 지적이 비난인지 비판인지 분간할 힘을 상실했다.

내 아이돌은 절대 여성혐오하지 않지만 네 아이돌은 여성혐오 덩어리임을 입증하고픈 팬들. 여성혐오라는 유령이 남자 아이돌 팬덤을 떠돌고 있다.

 


모두가 여성혐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이쯤에서 짚어봐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과연 여성혐오하는 아이돌은 2016년에 뿅 하고 나타난 걸까? 여성혐오(Misogyny)는 고대 그리스어에 그 뿌리를 둔 단어로 가부장제가 시행된 이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자신의 지정성별이 여성이냐 남성이냐와 무관하게, 어떤 남자에게 여자 친구가 있고 그가 이성애 포르노를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여성혐오는 모두가 수행한다.

한국 가요계도 마찬가지다. 남자 아이돌이라고 해서 여성혐오에 면죄부를 갖고 있지는 않다. 나와 내 친구, 선후배들과 마찬가지로 내 아이돌 역시 여성혐오를 할 수 있다. 그것은 특이하고 이상한 일이라기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여성혐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그룹이 여성혐오를 한다는 사실보다, 아이돌 콘텐츠 속에서 여성혐오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를 헤드라인에 올리는 기자가 비판받듯, JTBC 예능 프로그램 <잘 먹는 소녀들>이 논란에 휩싸이듯 아이돌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팬 역시도 마찬가지다. 몇몇 팬들은 오해하고 있지만, 여성혐오 지적이 아이돌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팬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대중문화,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가 자신이 즐기는 콘텐츠를 비판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방탄소년단의 소속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201676일 다음 공식 팬카페에 여성혐오 논란에 대한 공식 입장을 게시했다. 소속사는 가사와 SNS 콘텐츠 속 여성혐오 논란을 인지하고 사과했다. ‘소속사와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여성혐오 지적사항과 문제점을 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인기 최정상 남자 아이돌 그룹이 여성혐오 비판을 받아들이고 배우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취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구매자() 대부분인 여성을 존중해주겠다는 모션은 역시 구매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던 뮤지컬 업계가 여성혐오 논란에 취한 모션과 천지차이다. 이제 제작자들은 아이돌 콘텐츠를 기획, 제작할 때 페미니즘을 신경 쓸 것이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얼마나 빨리 깨닫고, 젠더 감수성 높은 콘텐츠를 만들어 낼 줄 아느냐가 콘텐츠의 생명력을 담보하는 때가 왔다.

더 이상 우리 오빠가 여혐러일까봐 두려워할 시간이 없다. 내가 느낀 내 아이돌의 여성혐오를 숙고해보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다.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필자 광개토.

광개토대왕님 만큼이나 넓은 (덕질) 영역을 자랑하는 이 시대의 페미니스트 덕후

최근의 즐거움은 세일러문 크리스탈과 오마이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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