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학교는 여성학을 의무교육하라!
by. 한의 민족


어느덧 대학은 새로운 학기를 맞이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안고 강의시간표를 조회한다. 여전히 여성학은 보이지 않고 나는 좌절한다. 페미니즘이 공론의 중심이 되면서 많은 수의 학생들이 여성학 수업을 교양 필수로 배워야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학은 교양 필수가 되기는커녕, 강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어 선택의 자유가 없거나, 아예 여성학이라는 글자 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여성'이 들어간 강의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담당 교수의 지난 여혐 발언이나 행실이 캥겨 수강과 포기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까지 한국의 대학에서 여성학 강의를 풍부하게 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듯하다. 1990년대에는 약 69개 대학 내에 여성학이 개설되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대학내 여성학 관련 강의, 프로그램과 석사과정들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급격히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여대생으로서 뼈아프다. 지성의 최전선인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외면한 것은 '인격을 도야하고,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교육 기관'이라는 기능을 져버리고 단순한 학원으로 전락하겠다는 선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성차별으로 인한 병폐가 극에 달한 사회는 다시금 페미니즘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은 시대의 요구인 페미니즘에 기민한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이다. 또 대학은 한국에 만연한 성차별 정서를 환기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방법을 논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글로벌사회를 대비하여 세계시민윤리이자 민주시민의 기본 소양인 여성학을 필수 교양으로 지정해 수학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90년대의 실패를 딛고 여성학을 대학에 유치시키기 위한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시기이다. 대학은, 학교는 페미니즘을 의무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도대체 여성학이 뭔데 그래? 바느질하고 다림질하는 거 배우는 거 아냐?
 
a) 여성학은 남성중심적인 학문 세계에서 규정된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비판하고,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학문이야.
b) 여성학은 새로운 성별질서를 구성하기 위한 학문이자 실천이야.
c) 바느질과 다림질과 같은 '여성이 하지 않으면 비난받는 일들'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주는 학문이야.

 (*여성학이 무엇인가라는 방대한 질문에 대해 필자 혼자만의 견해로 그 대답을 적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여성학 개론서의 도움을 받았다. 여성학의 정의, 특징, 다루는 영역과 연구 영역, 학문적 목표에 관한 설명은 한국여성연구소에서 나온 『새 여성학 강의(2005)』의 1장 「여성학이란 무엇인가」 꼭지에서 많은 부분을 발췌하고 정리했음을 밝힌다. 아울러 이 글을 넘어 여성학에 대한 전체적인 개괄을 알고 싶다면 본 책을 일독할 것을 권하며 글을 시작한다.)
 


여성학은 남성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기존의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이다.

당신은 일반 시민에게 참정권이 보장된 때를 아는가? 18세기~19세기 프랑스와 미국의 인권선언을 통해 일부 계층의 특권이었던 참정권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평등하게 부여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 당신은 '여성'이 최초로 참정권을 얻게 된 때가 언제인 줄 아는가? 

2015년 개봉하여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던 영화 <서프러제트>는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여공 '모드 와츠'를 비롯한 여성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이 야기한 짧은 수명, 성적 착취,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으며 남성 가장에게 귀속되는 삶과 가난의 대물림과 같은 차별과 억압이 있었음에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었기 때문에, 남성 정치인들에게 대변되고 규정될 뿐이었다. 그 결과 여성의 문제는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여성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여성참정권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그려지고 있듯, 여성참정권 운동을 한다는 것은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남편에게 쫓겨나고, 주위에서 '과격한 여자'라는 시선을 받는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서프러제트의 배경이 되는 영국에서는 왕이 참가하는 경마대회에 한 여성이 “여성들에게 투표권을!”이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두르고 몸을 던진 후에야 비로소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그것이 불과 1918년. 지금으로부터 겨우 100년 전이다.

만민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은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동시에 "만민"에 여성은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다. 당시 남성들은 여성의 참정권을 외치는 여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균형 감각이 없어서 정치적인 일을 잘 판단하지 못한다.’, ‘여성이 투표할 경우 사회 근간이 흔들린다. 아버지, 남자 형제, 남편 놔두고 왜 자기들이 나서는가.’, ‘일단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면 이를 멈추는 건 가능하지 않다. 여성은 국회의원, 정부 관료, 판사가 될 권리를 또 요구할 것이다.’ 이 주장들로 비롯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남성은 여성을 동등한 시민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학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여성학은 기존의 차별적 편견에 도전하고 비판하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즉 여성학은 남성 중심적인 학문세계에서 규정된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며, 여성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학은 여성연구 또는 여성에 관한 강좌를 통칭하며, 일차적으로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 경험, 지위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학은 다학제적 학문임과 동시에 실천적인 학문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여성학은 처음부터 여성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구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쟁점을 둘러싼 여성들의 운동을 기초로 출발하였다. 1960~1970년대 서구사회 여성운동의 활성화에 기반을 두고 여성해방운동을 목표로 하는 실천학문으로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여성학은 여성운동의 전개와 함께, 기존 학계에서의 지식이 가정하던 객관성을 의문시하고 그것이 전제하던 가정들을 해체하며, 여성의 역사와 체험을 무시하는 전통 학문을 비판하고 도전하면서 성장하였다.

여성학이 다루는 영역은 아주 다양하다. 여남의 인격 형성과 사회화의 문제, 가족의 문제, 성과 몸에 관련된 문제, 취업과 경제생활, 여성과 복지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여성학의 특성은 이 모든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는 점이 아니라 이 영역들을 여성의 시각과 입장에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다양한 사회문제와 여성 혹은 남성의 관련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성별 관계와 차이에 주목하기도 한다.

여성학의 연구 영역은, 현대사회에서 성에 따른 차별이 존재한다는 인식 위에서 여성들이 현재 당하는 사회적 모순과 여성 자신의 갈등(여성문제의 영역)에 초점을 두며, 미래에 대해서는 여성해방과 그 방법을 전망하고(여성해방론의 영역), 과거에 대해서는 여성에 대한 정당한 위치 부여와 평가(여성사나 여성예술가, 여성사상가의 재평가 영역)을 포함하는 논의를 모두 담고 있다.

여성학의 학문적 목표는 기존 지식에 담긴 남성 중심성을 바꾸고, 여성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여성적 관점에서 인간의 경험을 분석하는 것, 나아가 여성이 ‘여자’가 아닌 한 명의 시민으로서 존립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학점 낭비해 가면서 여성학 배우기 싫은데, 굳이 필수화를 해야 해? 교육의 자유를 보장해야지.

a) 실질적인 성평등을 이룩하기 위하여 여성학 수업은 필수적이다.
b) 일단 츄라이츄라이~!
c) 다른 교양필수 과목은 너무너무 듣고 싶어서 들었니?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시몬 드 보부아르

여성운동은 투쟁을 통해 여성의 참정권을 쟁취했고, 교육권을 확보했으며, 호주제를 폐지하는 등 여성과 남성간 제도적 차별을 철폐해갔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여자"이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일을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에 비해 60%에 불과한 돈을 받는다. 집안 대소사를 결정할 때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남성들이고 여성들은 그 옆에서 조신하게 과일을 깎고 있는 풍경이 익숙하다. 같은 성적을 냈을 때 남성 동기는 '가장'이 되어야 하므로 승진에 우선권을 받는다. 여성 태아만을 선별적으로 낙태하는 데 일조했던 국가가 이젠 그들에게 출산절벽시대이니 아이를 낳으라 독촉한다. 심지어 '몰카'는 남성이 여성이 화장실에 가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조차 포르노로 소비한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처럼 사회는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실제로 역사는, 사회는, 문화는, 그리고 국가는-사실상 모든 것들이- 남성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그들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남성은 여성을 같은 사람으로, 동료로 보지 않는다. 남성의 시선 속에서 여성은 단순한 대상, 부차적인 존재로써 존재할 뿐이다. 문화적으로 성별 불평등이 잔류한 상태에서 ‘인간’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계적 평등에 불과하며 실효성이 없다. 결국 제도적 평등을 넘어 우리 사회에 안개처럼 산재한 여성혐오를 걷어내야 할 필요성이 재기되는 것이다. '여성은 연약하고 섬세한 존재'나 '여성은 모성본능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자녀 양육을 맡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라거나 '여성은 감성적이고 남성은 이성적'이라는 미신은 결국 여성을 부차적 존재, 아류, 이등시민에 묶어두는 역할을 한다. 남성들이 구성해 둔 미소지니 속에서 여성은 영원히 이등시민으로써 존재한다.

우리는 다시, 이것을 타파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페미니즘이라는 도구가 있다. 페미니즘은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혐오를 인지하게 해주고 나아가 차별을 철폐하고 진정한 평등을 이룩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여성학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시야와 사고방식을 제공한다.
 
이처럼 여성학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민주시민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교양 과목이 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여성학 교양 수업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인가. 여성학의 필수교양화를 촉구하기에 앞서 우리는 대학 내 여성학의 위치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성학은 다학제적 학문이라는 특징에 따라 주로 협동과정이라는 형식으로 대학에 도입되었는데, 그 결과 실질적으로 전임교수나 ‘공식적 학과’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체계적인 교과과정 조정이 어려웠으며, 학과의 물리적 지원이 거의 부재하기 때문에 운영과 관련된 재정확보의 어려움, 학생정원 자체의 불투명함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여성학과의 행정적 부실은 1995년 5.31개혁 정책 이후 대학정책이 시장친화적 효율성을 우선하는 ‘아카데믹 캐피탈리즘(academic capitalism)’과 맞물리며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990년대 까지만 해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여성학 프로그램과 학과는 축소되고 현재 별도 학과로 운영되는 여성학과는 없다. 이처럼 대학 내 여성학과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당장 여성학이 교양 필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인 전망은 담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여성학 교양”이 단순히 이론전달 수업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여성들이 실제로 겪는  차별과 억압에 대한 감수성은 여성학을 단순한 학문으로 대해서는 배울 수 없다는 큰 맹점을 갖는다. 또한 성적 평가가 병행하는 교과목의 형태로 진행되어서 학생이 강당 내에서 교수가 갖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여성학은 또다시 학점 경쟁의 콜로세움이 될 것이다. 여타의 교양과목과 마찬가지로 여성학이 대형강의로 진행될 경우, 개인의 경험을 발화하고 교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여성학의 실천적 특성을 간과한 채, 권위주의적이고 일방향적인 이론 수업으로 경직될 것이다.

여성학 교양 필수화 담론은 대학 내 여성학 정착 실패와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여성학은 반드시 배워야 할 과목이지만 여성학을 대학에 유치시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지 않은 채 단순히 교양필수화 시킨다면 여성학은 2000년대의 고배를 다시 한 번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실패의 기억은 역설적으로 여성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다시 떠오르는 페미니즘 붐에 발맞추어 대학의 현실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여성학 교양 강의를 장기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시기이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이권만을 챙기는 이익집단이므로 교사자격이 없다. 남혐교사, 동성애 옹호 교사를 퇴출하라!

a) 남혐은 없어! 같은 시민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우자는 게 왜 남혐이니? 
b)니가 아무리 난리쳐봐도 네 옆에 동성애자는 사라지지 않아. 같은 시민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편이 빠르겠다!
c)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성차별주의자라는 말인데, 성차별주의자는 더더욱 교사 자격이 없다!  


우리에겐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7월 말 인터넷 매체 닷페이스에 "학교에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한 이유 세가지!"라는 인터뷰 동영상이 게시되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의 언어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성차별과 성폭력이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차별적인 언행을 돌아보고 인권이 존중되는 성평등한 학교를 만들자는 제안'이 페미니즘 교육임에도 불구하고, 혐오세력은 인터뷰를 한 해당 교사를 '"남혐"교사'나 '동성애 옹호 교사'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한 달 가까이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들은 지난 8월 26일 밤 11시 정각부터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왜 학내에서 성평등 교육이 필요한지를 적은 글과 함께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가 붙은 손글씨 인증 사진을 올리는 ‘8·26 공동행동’으로 맞섰다.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를 실천한 교사를 마치 학교와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문제적인 인물로 규정하고 혐오세력이 집중포화를 쏟은 이 일련의 사건은 현 시점 한국의 페미니즘 지형도를 보여줘 착잡한 심정을 달랠 수 없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페미니즘에 대해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잘못되고 편파적인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학습하고 재생산하는 혐오세력에 의해 오염되었다. 교육현장의 성평등 교육에 대한 무지도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나 교사가 왜 페미니즘을 교실로 가져왔는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비방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해당 교사가 페미니즘을 교실로 가져온 가장 큰 원동력은 "미안함"이라고 밝혔다. 학교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성차별적이다. 신체적인 활동의 장인 운동장을 전유하는 남자아이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남자아이들이 활발하니까 그것이 당연한 풍경이라는 것은 성차별적인 편견이다. 이 뿐인가? 학생들은 "여자를 도구화시키고 트로피로 여기는" 글을 교과서에서 보고 듣고 읽으며 성차별적 편견을 내면화시킨다. 가해 학생의 괴롭힘을 참다 못해 울음을 터트리는 피해 학생에게 '걔가 널 좋아해서 그러나보다'라는 말을 하기도한다. 일본의 성인 비디오에서 나오는 여성의 신음을 밈화 시킨 '앙 기모띠'가 아무렇지도 않게 초등학교 교실에서 사용된다. 이 모든 것들은 남자 아동에게 성적 권력을 부여함과 동시에 여자 아동에게는 이의를 제기할 기회조차 박탈시킨다. 

페미니즘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왜?"라고 물어본다. 왜 운동장은 항상 남자아이들이 사용하고 있지? 왜 여자아이들은 조신해야 하지? 왜 전래동화에서 항상 여성은 남성의 어머니이거나 아내로만 나오지? 왜? 왜? 왜? 이 질문들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지하게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을 비판할 능력을 키울 것이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앙 기모띠~'라는 유행어를 더이상 재미삼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에 대한 비판이 오고 갈 것이다. 더이상 괴롭히는 남자아이에 대하여 '걔가 널 좋아해서 그러나보다'라는 말을 통해 가해 사실을 옹호하고 여자아이에게 참으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 받을 것이며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서 대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혹자가 걱정하는 것처럼 페미니스트 교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여자아이에게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스트 교사의 존재는 교육현장 내부에 산재해 있는 성차별과 불평등을 지적하고 함께 수정해 성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은 억압과 차별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이자 그것을 철폐하고 성평등을 지향하는 정의에 대한 요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인권의 문제이자 민주시민사회의 기본 소양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페미니즘 교육과 그것을 알려줄 수 있는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하다. 적어도 교육자의 입에서 나온 성차별적인 발언때문에 상처입는 사람들이 더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평등 교육은 성평등 사회의 시작이며 성평등 교육은 페미니스트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다. 학교가 가정 다음으로 사회화 훈련장이라면, 그들을 지도하는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출처: 페미니스트 교사 공동행동 트위터 계정 @teachersforfemi )


페미니스트 교사에 대한 혐오세력의 비방과 그에 맞선 지지성명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9월 7일 페미니스트 교사들에 대한 공격을 중단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으며, 페미니스트 교사 공동행동은 9월 26일 저녁 8시에 #학교에_페미니즘을 공동행동을 기획해 다시 한 번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페미니스트 교사행동은 학교에 페미니즘을 가져오기 위한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교실에 성평등이 도래할 때까지 이 술렁임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인 자신을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 여혐 사회이며 호모소셜이 유지되는 방식이다. 남성사회가 여성혐오를 사용하는 방식을 알게 되면, 마치 내가 서있는 지반이 꺼지는 듯한 불안과 좌절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몸담아 온 사회가 나를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느끼는 배신감을 감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사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기만한 채 살아가는 편이 편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여성들이 그랬듯이 언젠가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불평등과 혐오를 마주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이후에 우리는 맞서 싸울 수 있다. 그것 또한 지난하고 고독한 싸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학은 그 길을 앞서 밟아간 선구자들의 존재를 알려주고 헤쳐 나갈 방법들을 제시한다. 여성은 여성 자매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고, 투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투쟁할 것이다. 어떤 권력도 스스로 그것을 내려놓지 않지만, 여성들은 투쟁을 통해 다른 여성들의 권리를 쟁취해 왔다. 페미니즘이 걸어온 길이 그러했듯이, 이 길의 앞에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다. 우리 모두 페미니즘을 하자!



출처: 
(사) 한국여성연구소. (2005). 『새 여성학 강의』, 동녘.
이나영. (2011). 한국 ‘여성학’의 위치성: 미완의 제도화와 기회구조의 변화. 한국여성학, 27(4), 3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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